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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utiPo Feb 07. 2018

[Part3] 오로지 나를 향한 시간, 후회와 행복.

[Part 3 : 행복하지만 불안한, 퇴사 이후의 삶]

2017.6.16(금) / 회사를 떠나고 148일 후.


몸살이 났다. 처음에는 몸이 으슬으슬하고 뒷통수가 찌릿찌릿하게 당겼다. 눈을 감아도 온 신경이 곤두서서 잠이 오지 않았고, 속이 울렁거려서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나는 집에서 혼자 불도 켜지 않고 누웠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허기가 지면 냉장고에 있는 수박을 대충 믹서기에 갈아서 들이켰다. 밤새 열이 나서 혼자 물수건을 해서 이마에 얹었다가 내려놓았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깼다는 반복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간헐적으로 찌르는 듯한 두통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자 목이 따끔거렸다. 병원에 가보니 원래부터 편도염에서 시작된 병이었단다. 두통과 오한 때문에 목의 통증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잠들면 아픈 것을 잊어버리니까, 신생아처럼 하루에 스무시간씩 잠을 청했었다. 편도염과 역류성 식도염으로 며칠 약을 먹으며 비실거리다가, 오늘에서야 약기운이 돌며 좀 살만 해졌다. 오랜만에 사람다운 시간에 일어나 사람답게 하루를 시작했다.


난장판이 된 집안을 정리하고, 밀린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려 널어놓고 청소기도 돌렸다.



그동안 역류성 식도염에 좋지 않아서, 그리고 어차피 늘 잠들어 있느라고 커피를 며칠 마시지 않았었다. 그런데 약기운에 조금 살만 하니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커피다.


나는 늘 내려 마시던 캡슐커피 대신, 베트남 여행에서 사온 일회용 드립커피를 천천히 내렸다. 캡슐커피보다는 연하니 괜찮을거라는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어 연하고 구수한 커피를 만들었다.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도 안 한 부스스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오른손을 뻗어 닿는 곳에 커피를 올려 놓고 앉아있으면 세상 행복이 내 것 같다. 아주 편안한 안도감과 뜨거운 설렘이 교차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여전히, 해가 지면 가계부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고, 아이고 이 화상아, 어쩌자고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을 걷어찼니, 혼잣말을 한다. 그러다가도 이렇게 해가 뜨고, 내 친구들 모두가 어느 빌딩엔가로 뿔뿔이 잡혀들어간 한낮에 이렇게 혼자 조용히 컴퓨터를 마주하고, 나 자신을 마주하고, 오로지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나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시간이 돌아오면, 그래 역시 잘했어, 싶은 것이다. 나라는 인간이 이렇게 간사하고 비겁하다. 늘 편한 쪽, 좋은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당장 내년에 교대에 입학만 하더라도, 이런 생활을 계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지금의 이 생활이 너무너무 행복하다.


공부하고 생각하고 게으를 시간이 있다는 것. 오늘은 어떤 커피를 먹을지 고민할 시간이 있다는 것. 한 끼도 사먹지 않고 오늘은 어떤 신선한 재료를 도마위에 또각또각 올려볼까 고민할 수 있다는 것. 내가 무엇을 먹고 있고 언제를 살고 있는지 인지할 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것.







취준생부터 퇴사 이후 새출발까지, <나의 똥같은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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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 : D-Day, 회사를 나서다 (☞ 첫 글 보기)
Part 1 : 취업 준비  (☞ 첫 글 보기)
Part 2 : 직장 생활  (☞ 첫 글 보기)
Part 3 : 퇴사 이후  (☞ 첫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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