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대를 잡고 처음 느낀 것

움직일 수 있다는 감각

by 산다

남편이 야간 일을 시작했다.
그 선택에는 그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아침에 퇴근해 잠을 자야 했기에
주말에는 아이들을 내가 혼자 맡게 되는 날이 생겼다.


평일 온종일 식당에서 일을 하고

주말 내내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버거웠다.
몸이 먼저 지쳤고, 생각은 그 다음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제는 누군가의 선택에 기대
움직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겁이 많았던 나는 오랫동안 집 근처만 오가며 살았다.
아이들과의 이동도, 생활의 반경도 늘 조심스럽게 제한해두었다.
장거리 운전은 늘 남편의 몫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을 태우고 두 시간 반 거리의 친정까지

혼자 운전해 다녀왔다.


출발할 때는 손에 땀이 났다.
하지만 길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고, 나는 생각보다 잘 해냈다.

돌아오는 길에 몸이 먼저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할 수 있다’는 감각이 오래 묶여 있던 무언가를
조금 풀어주는 느낌이었다.


그 뒤로 인근 도시에도 나가고,

아이들과 작은 여행처럼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운전대를 잡고 나는 처음으로
‘내가 이동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감각을 되찾고 있었다.


누군가의 결정에 기대지 않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감각.


막막할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건 해결책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이라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이 작은 이동들이 곧바로 자유를 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나를 같은 자리에 묶어두지는 않았다.





*이 글은 한 집에 살면서 각자 살게 되었던 시간들을 기록한 연재의 일부입니다

앞선 이야기들은 아래에서 이어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dudal1104/1

https://brunch.co.kr/@dudal1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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