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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 꿈의 암시 작용

소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6화 : 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7화 : 길박사의 족집게 강의

제8화 : 배신

제9화 : 김대리의 제안

제10화 : 개선 작업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길박사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길박사는 물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른다. 제안서 프로젝트에서 내가 진즉 제외됐는지, 김대리가 TFT를 꾸려서 나교수와 어떤 은밀한 공작을 진행 중인지, 내가 그 끝에 결국 퇴사라는 마침표를 찍게 됐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순진한 길박사는 제안서 더미를 뒤진 끝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겨우 추려냈다고 당장이라도 보내주겠다고 흥겹게 말했다.


하지만, 데드라인은 훌쩍 지나가버렸다. 엄청난 뒷북치기다. 게다가 나는 이미 퇴사까지 감행해버렸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퇴사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덩달아 마음도 완벽하게 떠나버렸다. ‘제안서 따위는 앞으로 절대 쓰지 않을 거야’, 라고 작심까지 해버렸다. 그의 제안이 고마웠지만, 결국 완곡하게 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길박사에게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상황을 솔직하게 전달했다. 100% 수준에 수렴할 정도로 상당히 쪽팔렸지만… 보도국의 지침에 따라 성실하게 글을 쓰는 기자처럼 그렇게 나는 왜곡은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만을 길박사에게 전달했다. 사건을 요약하기 위해 과거사를 돌이키다 보니 가슴 한가운데가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길박사에게 당분간은 일을 떠나 쉴 작정이라고 말했다.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어요?’ 라고 길박사가 물었지만, 그런 거 없이 그냥 무작정 쉬고 싶다고 말했다.


길박사와 전화를 끊고 김대리에게 배신당한 기억이 한가득 몰려오는 바람에 침대에 누웠으나 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불을 끄고 방 한가운데를 지독한 어둠에 휩싸이게 만들어도, 눈을 감고 더 새까만 어둠에 뛰어들어도 억지로 잠재워버린 의식들이 살아나 공기 중에서 떠다니며 줄기차게 나를 괴롭혔다. 결국 잠을 포기하고 포우의 무서운 단편을 읽다가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올 때쯤에야 겨우 잠에 빠졌고 꿈을 꿨다.


꿈을 묘사하자면 대충 이랬다.


길고 적막하고 축축한 잠. 터널처럼 완벽히 검은 공간에서 나는 헤매고 있다. 더듬더듬 길을 찾아가던 나는 작은 점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무작정 걷는다. 걷고 그러다가 돌 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그래서 기어가다 점 끝에 겨우 다다른다. 점과 가까워질수록 점은 더 세력을 확장하지만 정작 나는 왜소해진다. 말하자면 점은 자신의 몸집을 내 위치에 따라서 자유롭게 줄였다 늘였다 한다. 그러다 나는 그 점 끝을 통과해서 어느 지점에 당도한다.

이해할 수 없지만, 꿈속의 세계에서 나는 내 방에서 산토리니와 비슷한 어느 곳까지 공간을 이동했다. 물론 나는 산토리니에 가본 적이 없다. 무의식적으로 그곳이 산토리니일 거라고 추정했을 뿐이다. 근거는 없다. 내 마음 어디선가 비롯된 그릇된 믿음이 그것을 사실이라고 떠받칠 뿐.

오직 하얀 벽과 파란 지붕이 전부인 그곳에서 나는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몇 개의 계단을 오르고 내린다. 간혹 벽을 붙들고 가파른 언덕길을 조심조심 내려가야 하기도 한다. 그러다 먼 곳, 파란색 지붕 위에 서 있는 낯선 사내를 한 명 목격했다. 그 사내는 오크로 만든 야구 방방이를 양손에 들고 나를 잠자코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비좁은 골목 사이를 지나다니며 그 사내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나도 모르게 눈길이 그쪽으로 돌아가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사내는 야구 방망이를 양손에 들고 당장 위협이라도 가할 것처럼 결의에 차 있다.

그러다, 사내는 오크 야구 방망이를 들고 바구니에서 야구공을 집어 든다. 하지만 그 야구공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태양처럼 말 그대로 활활 타오르는 중이다. 사내는 그 공을 한 손에 들었으나 공에서 전해지는 온도를 느끼지 않는다. 사내는 공을 공중에 슬쩍 던지고 떨어지기 무섭게 배트로 프리배팅하듯이 스윙을 한다. 기막힌 타이밍이다. 완벽한 정타다. 작은 태양이 배트에 맞기 무섭게 내 쪽으로 날아온다. 나를 정확히 겨냥한 것이다.

터널에 마주친 작은 점처럼 그 새빨간 공은 작은 마침표에서 시작해서 커다란 태양으로 변신해간다. 남자는 계속 작은 태양을 손에 쥐고 공중으로 던진 후 습관적으로 스윙을 한다. 계속 정타가 나오고 그럴 때마다 점 하나가 태양이 된다. 나는 피할 수 없다. 지금은 가까스로 내 옆을 스쳐갔지만 언젠가 저 태양이 내 몸 정면으로 날아와 결국 내 의식 한가운데를 관통하리라.


대체로 꿈은 그런 형태였다. 며칠 째, 같은 꿈을 매일 꾸는 소설가처럼 나도 똑같은 꿈을 계속 꾸고 있다. 꿈속에서 나는 터널을 통과해서 어느새 산토리니 섬에 가 있고, 그곳에서 낯선 사내에게 원인 모를 공격을 받는다. 사내가 왜 나를 지목하고 공략하려는지는 알 수 없다. 사내는 그런 역할을 하기로 이미 예견되었을 것이다. 꿈속에서 나는 아슬아슬하게 사내의 공격을 피하지만, 언젠가 결국 제압당하고 말 것이다. 그런 암울한 미래는 굳이 예측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꿈은 어떤 미래를 암시하려는 걸까? 정해진 운명대로 내가 적확하게 이동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걸까? 사내는 누굴까. 사내는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걸까. 나는 어디로 가는 중일까?


침대를 정리하고 책상에 앉았다. 노트북 덮개를 열고 이메일 함을 열었다. 길박사에게 메일이 한 통 도착해 있었다.


홍대리님 소식 잘 들었어요. 일이 그렇게까지 안 되는 쪽으로 흘러갈지는 몰랐네요.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 자료를 보내드릴 걸 그랬나 봐요. 제가 빨리 도와드렸으면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 제 마음이 더 무겁습니다.

그래서 제안을 한 가지 드려보고 싶은데요. 지금 홍대리님에겐 휴식하면서 재충전할 시간도 필요하지만, 미래를 준비할 시간도 동시에 필요한 것 같아요. 사람이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장소에 머물면서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거든요. 그 방법이 바로 지금 제안해 드리려는 내용의 핵심입니다.

강원도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제가 아는 분이 펜션을 운영 중이십니다. 그곳에서 잠시 휴가라도 가져보는 게 어떨지 홍대리님께 추천하고 싶네요. 부담은 느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홍대리님께 진 부채를 갚는다 생각해 주세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마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갖게 됐으면 좋겠어요. 혹시 관심 있으시면 꼭 연락 주세요

길박사.


그가 나에게 어떤 부채를 졌는지 잘 모르겠다. 그는 마지막까지 나를 도와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나의 불성실함이 이런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길박사의 제안은 고맙지만, 현재로서 나는 여행을 떠날 기분도 휴양지에서 마음을 놓을 기분도 아니다. 게다가 인수인계할 내용을 정리해야 한다. 모든 게 정리되면 그때는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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