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장 그르니에의 <섬>의 도입부를 읽다 그만 잠이 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디까지 읽다, 어느 시점에서 길을 잃어버렸는지 명확한 기억은 없다. 오직 도입부에서 헤매던 기억만 남아 있다. 그러다, 아침이 찾아왔고 거실 한가운데까지 햇살이 길게 기지개를 피우고 나서야 아침이 한 참 전에 지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침대 위에서 거드름을 피우는데, 어딘가에서 ‘그만 일어나서 행동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강조하자면 나는 10평 작은 원룸에서 혼자 산다. 밤에 외롭다고 우렁 각시를 남몰래 데리고 사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심심하다고 숨바꼭질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절대 환청은 아니었다. 장담하건대, 나는 분명 그 소리를 내부가 아닌 내 방 어딘가에서 들은 것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소리에 바로 반응했다. 그리고 명령에 불응하지 않고 곧바로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정예 요원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부자리를 개키고 이빨을 구석구석 닦고 샤워까지 단숨에 해치워버렸다. 거의 고양이 세수 지경이었지만… 그리곤 미리 내려둔 커피를 원샷으로 들이켜고 이 집이 아니라면 그 어느 곳이라도 상관없는 태도로 외출이란 걸 감행해버렸다. 마치, 조선의 왕이 밤에 잠행이라도 펼치듯이, 다만 대낮인 것이 흠이긴 했지만…
나가자마자, 퍼뜩 떠오른 생각은 김대리를 만나야겠다는 것이었다. 왜 김대리를 만나야 하는지,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결정된 것은 없었다. 그것은 지극히 즉흥적인 판단이었다. 멱살을 뒤흔들던지, 얼굴에 주먹 모양을 크게 박아주던지, 그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행전지가 결정되자, 지금 이 시간에 어디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뿐이었다. 그가 합숙하던 플라자 호텔로 찾아갈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제안서 제출이 이미 끝났으니 합숙은 이미 종료됐을 확률이 높았다. 대면평가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런 일은 합숙하지 않아도 제각각 예상 질문을 꼽아놓고 침대에 누워 포테이토 칩이나 하나씩 입에 넣으면서 대응해도 그만이리라.
그런 생각이 들자, 당장 김대리 뒤에서 초크를 걸고 싶어도 일단 만나야 그런 복수혈전도 가능하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으려나. 나는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 먼저 김대리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판단이 들어, 그룹웨어에 접속한 다음, 그의 소재지를 확인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김대리가 플라자호텔에서 합숙을 마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불행인 것은 그 호텔에 아무나 드나들 수 없다는 것이었고 스위트룸은 워낙 경호가 삼엄해서 개미 한 마리조차 드나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소 막막하긴 했지만, 일단 호텔 입구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김대리가 BMW 컨버터블로 차를 얼마 전에 바꿨다는 사실만 알고 있다. 그것이 현시점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정보다. 나는 그 정보를 안고 주차장 출구에서 03년식 아반떼 보조석에 앉아, 눅진한 햄버거 따위나 씹어대며 피의자를 탐문 조사하는 형사처럼 김대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어쩌면 김대리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그저 무시하고 지나쳐갈 공산이 크다. 아니라면 차를 멈추고 뛰쳐나와서 '홍대리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전화하고 호텔 커피숍에서 기다리지 뭐하려 바보같이 바깥에서 기다려',라고 친절하게 내 어깨를 부축하며 말을 걸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김대리를 발견했으나 나는 차를 멈추게 할 자신도, 차 앞에 자빠져서 할리우드 액션을 펼칠 자신도 없었다. 그저 먼발치에 숨어서 그가 주차장을 유유히 빠져나갈 때까지 컨버터블 뒤꽁무니나 허망하게 바라봐야 할 것 같았다. 마치, 고양이가 발코니 너머의 들고양이들을 구경하듯이…
그러다, 어디서 용기가 생긴 건지 김대리의 차 앞으로 뛰어가 그대로 배치기를 해버렸다. 물론 실제로 배치기를 했다는 건 아니다. 배부터 막으면 왠지 녀석이 멈출 수밖에 없을 거라는 예측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김대리는 내 배를 밟고 넘어가진 않았다. 컨버터블을 세우고 마치 벌레를 바라보는 것처럼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볼 뿐. 그러다 컨버터블을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유유히 달아나버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김대리를 위에서 언급한 얌전한 고양이처럼 쳐다보기만 했다.
어디 영화에서 본 것은 있어 가지고 지나가는 택시 하나를 곧장 불러 세웠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리곤 ‘아저씨 저 앞차를 따라갑시다!’라고 외쳤다. 택시 기사는 사건에 휘말린 것이 무료한 오후를 날려버릴 만한 신나는 일이라고 판단한 것인지, 벨트 단단히 매라고 말하며 자신만만하게 출발했으나 몇 블록도 지나지 못하고 김대리를 놓치고 말았다. 이 기사는 아마도 초보임이 분명했으리라.
어쨌거나 나는 김대리를 현장에서 놓쳐버렸다. 현재로선 복수할 기회를 날린 셈이다. 결국 차일로 기회를 미뤄야 한다. 아쉽지만 별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설 내가 아니다. 어디로 가든 김대리는 오늘 내로 집에 갈 것이 아닌가. 그러면 내가 먼저 호랑이굴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된다. 그래 김대리의 집으로 쳐들어 가자.
그렇게 결심한 나는 녀석, - 이제 김대리라는 호칭은 생략하기로 한다. - 의 주소를 확인하기 위해 그룹웨어에 접속했다. 아직 내 아이디가 살아 있다. 당연한 결과다. 아직까지 서류상으로 나는 퇴사자의 신분이 아니다. 아무튼 나는 녀석의 개인정보를 클릭한 후 간단하게 주소를 알아냈다. 강남구 역삼동 모 오피스텔이었다.
마침 플라자호텔에서 역삼동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곧바로 역삼동까지 날아간 후, 한달음에 그의 오피스텔 10층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발로 문을 강하게 걷어차며 초인종 버튼이 부서지도록 거칠게 눌러댔으나 그 소리에 반응하는 쪽은 녀석이 아니라 눈을 흘겨대는 이웃들 뿐이었다.
나는 작전상 일단 후회해야 할 듯싶었다. 다시 건물 주차장 입구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든가, 아니면 오늘은 후퇴를 선택하든가. 둘 중의 선택지가 하나뿐이었지만, 결국 중대한 선택을 하기로 작정했다.
1층 카페에 내려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 아웃하고 잠시 바깥에서 숨을 고르곤, 2차전을 위해 10층으로 다시 올랐다. 이번에는 비교적 평온한 자세로 일단 녀석이 집에 있든 그렇지 않든 집안으로 진입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도어록을 강제로 해제하자고 결심한 것이었다.
도어록은 비밀번호를 세 차례 실패하면 락이 걸린다. 그러니 세 번 실패해서 내가 진입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녀석도 곤란함을 겪게 된다. 운이 좋아서 3번 이내에 성공한다면 나는 녀석의 본거지를 털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셈이다. 나쁘지 않다. 좋지도 않지만 나쁜 건 적어도 없다. 공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것은 그저 게임이다. 다양한 모양의 열쇠를 들고 구멍에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나는 첫 번째로 그의 사번을 시도했다. 애석하게도 첫 번째 입력은 실패였다. 두 번째는 녀석의 생일이다. 아쉽게도 그의 생일을 모른다. 녀석이 언제 태어났는지 내가 알게 뭐랴. 그룹웨어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시도해봤다. 손이 덜덜 떨리는데, 옆집이 문을 빠끔히 열고 조용히 누르라고 주의를 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제발 은밀히 하면 좀 안 되겠냐고. 그렇게 말할 것 만 같았다.
나는 마치 깊숙한 수면 아래로 침투하는 다이버처럼 한꺼번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숨을 몰아서 쉬었다. 하지만 또다시 나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마지막 기회만 남았다. 이번 기회에 통과하지 못하면 녀석의 집으로 침투할 방법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이것도 불가능하다면 나는 오피스텔 외벽을 통해서 진입하는 방법밖에 없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다.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다. 머리를 쥐어짜 내 보자. 아이큐를 순간 2,000까지 끌어모으는 것이다. 영혼을 다해서…
제13화 미행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