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지막으로 녀석의 프로젝트 데드라인 날짜를 입력하기로 했다. 조심조심, 실수는 이제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4자리의 숫자를 한 글자씩 1초마다 정확히 입력했다. 딩동댕, 앗 문이 열렸다. 영화보다 더 박진감 있게 스토리가 전개된다. 역시 현실은 영화보다 재밌다.
그가 집에 숨어 있건 그렇지 않건, 나는 이제 그의 소굴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돈키호테처럼 자신감 넘치게 문을 열어젖힌다음,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김대리야 나와라! 내 심판을 받아라!’라고. 하지만 칼 따위 같은 건 없었다. 흔하디 흔한 커터칼 같은 것조차도… 대신 신발이라도 날렸어야 하나.
의도치 않게 이야기가 추리소설이라는 선로 위를 위태롭게 달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창조적인 작가도, 세상을 창조하는 절대자도,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법을 엉터리로 사용해대는 협잡군도 아니다. 그저 그날의 일들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웃들이 눈치채기 전에 재빠르게 도어를 닭 모가지 비틀 듯 그렇게 안으로 진입했다. 현관 입구 등이 갑자기 켜지는 바람에 깜짝 놀랐지만, 내부엔 정적이 외롭게 하품만 할 뿐이었다. 어쩌면 어딘가 녀석이 교묘하게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적잖게 긴장이 되긴 했지만, 그럴 경우엔 오히려 맞서 싸우면 된다고, 이판사판이라고 작정했기 때문에 딱히 공포스러운 상황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곳엔 이렇다 할 반전 스토리 같은 건 없었다. 독자들은 한 판을 기대했겠지만, 내 부족한 수사법으로는 역부족이 아닌가. 역시 예상한 대로 녀석은 부재중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이 설득력을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남의 집에 주인이 부재한 상태에서 침입하여 주인의 귀가를 몰래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사람을 은근히 들뜨게 만들었다. 나는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집에서 준비해 간 까만 비닐봉지 두 개를 신발에 칭칭 감았다. 어디선가 영화에서 본 장면 덕분이었다. 다소 볼품없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이곳에 침입했다는 사실만 감추면 그만이었다.
신발에 비닐봉지를 씌우고 발목에 그것을 적당하게 묶어둔 다음 거실로 진입했다. 화장실과 싱크대를 사이에 두고 좁은 현관을 지나치니 바로 거실이 나타났다. 드디어 녀석의 본거지가 완전히 확보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간이 격벽을 지나자 안쪽으로 기다란 책상과 책장이 기역자 형태로 놓여있었는데, 조명이 어두워서인지 그 형태가 아른아른할 뿐 어떤 구체성을 띄진 못했다. 그렇다고 녀석의 공간을 두루 구경하겠다고 베란다의 커튼을 열어두고 환하게 햇살이 거실까지 드나들도록 허락할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녀석은 언제든 집으로 돌아올 수 있고, 그때 거실이 환하게 열린 모습을 본다면 그에게 대응할 가능성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므로, 오히려 역습을 충분히 당할 수도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런 빌미 자체를 제공하는 게 싫었다. 녀석이 공격을 당한다면 무방비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승산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다소 답답하긴 했지만 어두운 상태에서 녀석의 내부를 조사하기로 작정했다. 눈이 그곳에 적응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소요될 뿐이라서, 나는 단순하게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얼마간 침착하게 시간을 보내자, 감사하게도 눈이 공간에 적응했다. 침침하던 것들이 보다 명료해지고 빛을 받지 못해서 소외되던 물체들이 제 살갗을 노출했다.
30센티미터쯤 될까? 책상 치고는 다소 좁은 폭. 그 책상 위엔 2칸 정도의 간이 책꽂이가 놓여 있고 그 위엔 누런 화이트보드가 장식되어 있었다. 화이트보드가 누렇다니 지저분한 놈.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녀석이 화이트보드에 장식해놓은 온갖 모양의 포스트잇, 사진, 표식, 그리고 불순한 행동 강령들이었다.
그 화이트보드엔 내 사진, 연예인도 아닌 내 사진이 왜 녀석 정중앙에 떡하니 붙어 있어야 했을까, 그런데 좋아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 사진을 중심으로 X자 모양으로 빨간 테이프가 붙여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내 사진 옆에는 큰 글자가 연달아 쓰여있었는데 그 단어가 지칭하는 특정한 시점이 문제였다. 그 시점은 3년 전 어느 날이었는데 그날은 공교롭게도 사내 창업 경진대회에서 내가 우승한 날짜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짜를 중심으로 녀석은 나의 주요 일상을 추적하고 있었다. 마치 특별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지만, 복수를 설계하고 한 단계씩 무엇이든 실행하고 감행함으로써, 자신의 깊은 결핍과 분노를 잠재울 수 있다면, 그 어떠한 수단이라도 반드시 결행하고야 말겠다는 어떤 깊은 투지 같은 것이 화이트보드에 그대로 서려있었던 것이다. 화이트보드에는 회사에서 거둔 나의 모든 실적 그러니까 해커톤 대회 우수상, 기술연구소 소장과 함께 공저로 출간했던 출판물들의 표지 사진과 기념사진, 논문 실적, 창업경진대회에서 얻은 부상 5백만 원과 기념으로 유럽으로 연수를 다녀온 비행기 티켓과 녀석에게 자랑했던 베를린 필하모닉 티켓. - 헉, 베를린 필하모닉 티켓이 어느 날 집에서 사라졌는데, 그것이 녀석에게 전리품처럼 사용되고 있었다니, 나는 두 번째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녀석의 질투는 내가 회사에서 거둔 화려한 수상 경력과 부상으로 받은 해외 연수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래, 지금 모두 기억이 났다. 예선을 거쳐서 나는 결선까지 어렵지 않게 올랐고 그때마다 녀석과 경쟁 구도에 놓여있었다는 것, 다만 나는 그때 녀석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다. 나는 무엇이든 만드는 것 자체를 순수하게 좋아했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것을 아이디어로 연결시키는 것은 더욱 좋아했다. 나에게 창업경진대회란 것은 그저 관심 있는 대상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일에 불과했던 것이다.
창업경진대회란 것이 물론 거창한 이벤트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그마한 시장에서 구경꾼들이 잠시 모여드는 그런 저렴한 마술쇼 같은 것이었다. 그럴듯한 아이디어, 그러니까 실제 비즈니스 가능성보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A4 두 장 정도로 정리해서 제출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나머지는 평가장에서 어필하면 되는 것.
나는 당돌하게도 프레젠테이션 자료 같은 건 만들지 않았다. 아이디어는 전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생산된 것이므로, 나는 그것을 말이라는 수단으로써 말하자면 혀의 현란한 드리블의 형태로서 전달하면 그만이었다. 딱히 시간을 투자해서 우승한 다음, 그 상금으로 유럽 연수를 다녀와야겠다고 야망을 품은 것도 아니어서, 나는 그 당시 대회에 비교적 마음을 가볍게 품고 출전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창업경진대회의 기억이다.
그런데 녀석은 그 당시 나의 실적에 불만을 품은 모양이다. 아마도 본인이 우승하여 상금도 타 먹고 해외 연수 기회도 동시에 노렸을 공산이 크다. 아마도 그 자리가 제 것이었다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나라는 변수가 갑자기 수면 위에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자신의 계획이 나라는 방해물 때문에 망쳐졌고 계획이 순조롭지 못한 구석으로 돌아간 것이다. 아마도 녀석은 그때부터 나를 타깃으로 삼고 예외처리 대상으로 삼아 반드시 척결시켜야겠다고 작정한 모양이다. 나는 그의 성공 스토리를 위해서 반드시 눈앞에서 제거되어야 할 티눈 같은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녀석은 화이트보드 정가운데 내 사진을 비롯하여 나의 모든 경력과 실적들을 정리하고 어떤 과정으로 몇 년 동안 나를 제거하고 압박할지 기회를 포착하고 있었다. 주변의 어떤 사람들을 포섭해서 이용할지 마치 사자가 먹잇감을 조심 소심 사냥하듯 계획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내가 거기에 휘말려 들고 만 것이다. 아무런 제재 없이 나라는 허수아비를 그곳에 세워두고 온갖 비방과 모략질을 해대며 송곳으로 내 심장을 쪼아대고 있는 모양새였다. 어쩌면 내가 이번 프로젝트에서 그의 계획에 휘말려버린 것은 그가 정교하게 준비한 작업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저주에 당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