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삑삑 소리가 현관 쪽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바로 어떤 리액션을 즉각적으로 취해야 했는데, 마치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것처럼 최단 시간 내에, 미션을 수행하듯이 어딘가에 몸을 숨겨야 했다. 소리가 나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복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몸을 돌리고 소리는 나지 않지만 최대한 부리나케 위쪽으로 거의 구르다시피 몸을 던져 올렸다. 모든 과정은 녀석이 나머지 비밀번호를 누르는 동안인, 단 1초 내에 이루어져야 했다.
비교적 몸이 날렵한 나는 그 과정을 거의 0.5초 내에 수행해냈다. 거의 완벽한 착지였다. 나는 또한 아무 소리도 녀석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빈틈없이 동작을 단 한 번에 행해야 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내 동작이 거의 만점에 육박했을 거라고 추정하는 것은 녀석이 내부에 진입하자마자 누군가와 편안하게 통화하는 목소리 덕분이었다. 나는 몸을 낮게 엎드리곤, 침대 밑의 공간 속으로 몸을 날렵하게 굴렸다. 그리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안쪽으로 더 깊숙이 진입했다.
녀석은 들어오자마자 급한 볼일 따위는 보지도 않고 스피커폰부터 켜놓더니 소파에 털썩 앉아 누군가와 통화를 시작했다.
“길박사님 고맙습니다. 오늘 진흥원 담당자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길박사님이 힘써주신 덕분에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될 것 같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길박사님이 힘써주시지 않았으면 절대 불가능한 관문이었어요. 나교수님보다 길박사님의 힘이 더 크게 작용했다니까요. 나교수님이야 솔직히 명함으로 사는 분이지, 실무적으로 연구소를 이끄는 사람은 길박사님이잖아요. 길박사님이야 말로 업계 최고의 두뇌 아닙니까.”
“하하, 그런가요? 저야 뭐 선배님에게 전화 한 통 돌린 게 전부죠. 나중에 최종적으로 선정되면 사례는 해야겠지만, 그래도 과제가 잘 된 것은 김대리님의 치밀한 설계와 실행력 덕분 아니겠습니까? 저도 과제라면 벌써 나교수님 밑에서 실무적으로 숱하게 경험했지만, 김대리님처럼 스케일을 크게 벌려놓고도 그것을 일사불란하게 진행하는 분은 처음 봤어요. 놀라운 장악력이자 지배력입니다. 그리고 제가 더 놀란 것은 김대리님의 섭외력이었어요. 어떻게 단기간에 까다로운 나교수님과 진흥원 담당자까지 포섭하신 건지, 혀를 내둘렀다니까요”
“말씀 감사합니다. 사실 홍대리에 대한 반감 때문에 시작한 프로젝트였죠. 말하자면 한 인간을 몰락시키기 위해서 시작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한 사람을 파멸시키려는 게 다소 지나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승부욕으로 죽고 사는 인간이라, 게다가 홍대리가 별다른 노력도 하지도 않고 마치 천재인 것 마냥 대우를 받는 게 너무 싫었어요. 저는 밤낮없이 심신도 돌보지 않고 오직 노력 또 노력으로 일을 해도 될까 말까인데, 홍대리는 일하는 둥 마는 둥 그렇게 빈둥거리면서 일을 하더라고요. 그러고도 늘 높은 실적을 받았으니..."
“어느 날 저에게 이러더군요. ‘일이란 건 우뇌가 알아서 하는 거야. 얼간이들이나 밤새며, 온갖 것들 다 동원해놓고 시끄럽게 설친다고’ 이렇게요. 빈 깡통이 원래 요란하지 않냐고 하면서, 제가 하는 일을 대놓고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에이, 설마 홍대리가 김대리님을 지칭했겠어요? 그저 홍대리의 말 스타일 아닐까요? 천재는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보통 직감하지 못하죠. '그냥 이 쉬운 걸 대체 왜 못하는 거야?' 라고 말할 뿐이에요. 누구에겐 아주 당연한 일이고 누구에겐 식탁 위에 가만히 놓은 젓가락을 들지도 못하는 일이 되는 거죠. 홍대리는 그냥 홍대리답게 무심하게 말을 한 거예요”
“물론 그건 잘 알죠. 알아요. 그걸 모르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런 사실을 홍대리가 지각하지도 못한 채, 겸손하지 못하게 나불대는 것이 꼴 보기 싫었을 뿐이에요. 자각하건 그렇지 못하건 관심 없어요. 단지 그놈이 내 눈앞에서 시건방을 떨었다는 사실이 문제고, 내가 그것에 열이 받았다는 게 더 큰 문제인 겁니다. 제가 분노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러니까 그런 방식이 제 안의 어딘가 중요한 것을 건드리고 상해를 입혔다는 겁니다.”
“하하, 김대리님은 분노의 화신 같네요. 그래서 지금 그렇게 복수? 란 걸 하셔서, 보란 듯이 성공이란 걸 거둘 직전까지 오신 것 같은데요. 기분이 어떠신지 모르겠어요. 후련하십니까? 통쾌하신가요? 이제 화가 좀 가라앉았나요?”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더 화가 나요. 그놈과 제대로 정면대결을 펼쳤어야 하는데, 솔직히 그러지 못했잖아요.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공략했던 일본과 솔직히 다를 바가 없잖아요. 녀석은 아무것도 모른 채, 멍청하게 상황을 무시하다 뒤통수를 거세게 한 대 맞은 것뿐인데요. 뭐 그나마 긍정적인 것은 오늘 낮에 놈이 제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이네요.’
“헉! 그래요? 홍대리가 김대리님을 찾아왔어요?”
“네 점심때 플라자 호텔에 찾아왔더라고요. 주먹이라도 한 대 휘두르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 앞에 서서 잠시 까불어대더니 그게 전부더라고요. 지나가는 차는 어찌 막았는데, 그다음에 해야 할 일은 구체적으로 계획하지 못한 거죠. 즉흥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부류들의 특징 아니겠습니까? 그게 홍대리의 문제죠.”
“아하, 그렇군요. 홍대리가 김대리님을 찾아왔지만, 작은 테러 짓 하나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얘기네요. 빈 바구니만 확인한 셈이군요. 또다시 김대리님의 승리네요? “
“네 승리가 중요한 건 아니고요. 일단 일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연구비는 곧 타게 됐으니 멋지게 일을 해나가야 하겠죠. 조만간 나교수님이랑 같이 근사한 곳에서 식사나 해요. 제가 제법 괜찮은 레스토랑으로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래요. 조만간에 뵈어요. 그럼 또 연락해요”
“네 그럼”
녀석은 길박사와 통화를 마쳤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시계를 확인하더니 또 다른 약속이 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난 것인지, 잠깐 자리에 멈춰 서서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대체, 뭔 꿍꿍이를 부리려는 걸까.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치닫고 있었다.
사실, 나는 좀 전에 길박사와 녀석의 통화가 진행되면서 적잖게 놀랐다. 너무 놀라서 침을 꿀꺽 집어삼키고 말았는데, 그 반응과 함께 헉 소리를 나도 모르게 내지르고 말았다. 다행히 녀석이 길박사와 큰 목소리로 통화를 하는 바람에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나간 것 같진 않았다. 그만큼 내가 받은 충격이 심상치 않았다는 얘기였지만…
순간, 나는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 같은 것을 억제하기 어려워, 어쩌면 단 한순간에 아래층으로 뛰어내려 가 녀석의 멱살을 붙들고 오른손으로 녀석의 왼쪽 뺨을 실컷 후 갈겨 주고 싶을 심경이었지만, 그렇게 행동하진 못했다. 그럴만한 배포도, 자신감도 없었지만, 그렇게 했다가 훗날 다가올 예기치 못할 더 심각한 파국의 순간을 긴급하게 예상했기 때문이리라.
그런 상상을 하며 바닥에 납작하게 파전처럼 엎드려 있었는데, 녀석에게 다른 용무가 생긴 건지, 바로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침대 밑바닥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