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녀석이 녀석의 집에서 외출을 선택한 다음, 나는 긴장이 한꺼번에 풀려버리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녀석의 복층 침대 밑, 고요한 공간에 잠시 누운 것뿐이었는데, 갑자기 온갖 모양의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들어와 순식간에 나를 집어삼켜버린 것이었다. 어떤 불가항력적인 기운에 휩싸인 채, 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바다 위를 둥둥 떠다녔다.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들은 한낱 꿈에 불과하고 모든 사건은 그저 신기루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런 기대에 빠져서.
얼마나 잠을 잔 것인지, 이대로 잠들었다가 다시 녀석이 들어오면 그때는 일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너무나 오랜만에 맛보는, 말하자면 마치 사랑하는 애인 무릎 위에서 단잠이라도 즐기는 것처럼 달콤하고 편안한 순간을 맛본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세상에게 ‘네 마음대로 해버려 나도 더 이상 못해먹겠어’, 라고 외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모든 게 제멋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흘러가는 마당에,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게 있느냐, 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달까.
나는 상황을 한 번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나름의 어떤 장면을 상정해봤다. 이대로 계속 편안하게 바닥에 누워있다간, 언젠가 녀석이 집에 도착할 것이다.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도어록을 누르고 들어와 신발을 벗어놓고 가방을 소파 위에 던져 놓은 다음, 대충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샤워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태평하게 거실 한가운데 앉아 잠시 넷플릭스를 시청하며, 동시에 맥주와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먹다가, 하루를 마감할 것이다. 그리곤 지금 내가 누워있는 복층 위로 어슬렁어슬렁 올라오겠지.
그러면 녀석은 떡하니 침대 앞에 양반 자세로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일단 귀신인지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할 테니, 놀라는 것은 첫 번째고 아무런 예측조차 하지 녀석은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을 치다, 뒤쪽에 아래쪽으로 가파른 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자빠지게 되겠지. 뒤로 여러 번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다가 후두부를 난간에 강하게 충격하고 그러다가 목뼈가 툭 하고 부러지는 것이다. 난간 일부가 휘어지고 녀석은 그대로 바닥에 비명소리도 없이 나동그라진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나체의 형태로 녀석이 뻗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결말이다.
아마도 스토리는 십중팔구 그렇게 전개되지 않겠지만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어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기분에 마음이 고양되어서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녀석의 상태를 체크하겠지. 그런데 예상보다 호흡은 지극히 정상이고 약간의 충격만 받았을 뿐이다. 목뼈도 부러지지 않았고 후두부에도 심각한 외상의 흔적은 없다. 다행이다. 목숨은 건졌다. 내가 살인자가 될 뻔했는데, 녀석은 약간의 찰과상만 입었을 뿐, 큰 이상은 없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자리를 뜬다. 마치, 친구 집에 놀러 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는 이런 상상을 반복해서 했다. 녀석이 들어오면 나는 어떤 동작, 혹은 어떤 표정을 지어볼까. 더 기묘하고 극적인 자세란 무엇일까 이렇게 저렇게 궁리하며 자세든 표정이든 바꿔봤다. 핸드폰 불빛이라도 가동해서 그걸 얼굴에 들이대면 더 극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상상해보기도 하고, 그냥 소리를 질러서 더 분위기를 극대화시켜서 놀라게 해 줄까, 궁리를 해보기도 하고. 어떤 식으로 사건을 더 극적으로 고조시킬 수 있을지, 생각하며 기묘한 상념에 온갖 아이디어들을 추가해봤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이 공간은 녀석에게 친숙한 곳이고 나는 지극히 이방인에 불과할 뿐이다. 여긴 녀석의 홈그라운드다. 나는 공간이 주는 어떤 친밀함과 공간적인 특징을 이용할 수 없다. 심지어는 어느 곳에 요긴한 무기 따위가 숨겨져 있는지 그런 요새적인 특징조차 나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무력감을 한 아름 안은 채, 녀석의 본거지에 누워서 신세한탄을 하다가, 아무런 복수극도 현실 세계인 이곳에서 수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 생각에 더 깊은 허무에 빠져, 물기가 빠진 생선처럼 지느러미를 허우적대는 것뿐이다. 그게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나는 허탈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오케이 목장에서 방금 혈투를 마친 사나이처럼 모양 빠진 혈색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곤 내 사진이 찍힌 화이트보드를 한 번 바라보고 혹시 나중에 사용될지도 모르니, 구석구석 핸드폰으로 사진을 촬영해놓은 다음 다시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곤 내가 주인인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세로, 신발에 씌운 비닐봉지를 벗겨낸 후, 만약 점수를 준다면 거의 만점에 가까운 연기력으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1층에 내려와서 오피스텔 바깥으로 나오니, 문득 내가 갈 곳이 거의 없다는 생각, 오히려 내가 몇 시간 동안 머물던 곳이 어쩌면 내 집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이상한 망상만 들뿐. 바깥세상은 이미 어둠이 한가득했다.
가장 가까운 스타벅스를 찾아 바로 들어갔다.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한산했다. 빈자리를 고르곤 차가운 얼음이 가득 든 커피를 주문했다. 음료를 찾아들고 자리에 앉았는데, 옆자리에는 어떤 남자가 엄청나게 바쁘다는 듯이 어떤 일에 열중이었다. 노트북 스탠드를 펼쳐놓고 스타벅스 공식인 맥북프로를 꺼내더니 그 위에 그것을 예쁘게 올려놓고 옆엔 휴대용 모니터를 꺼내서 펼쳐놓고 커다란 소니 헤드폰을 귀에 척 걸치더니, 블루투스 키보드와 마우스를 꺼내놓고 연결했다. 남자는 한참을 그렇게 엄청나게 스케일이 큰 준비작업을 준비하더니 휴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곤 영국 축구를 틀었다. 흠, 나는 뭔가 의미심장한 작업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싱겁다. 싱거운 커피맛만큼, 남자도 스타벅스도, 내 삶도 싱겁기만 하다.
거창한 장비들을 줄줄이 쌓아놓고 영국 축구를 무심하게 즐기던 남자가 마치 비디오 되감기를 하듯 다시 역순으로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노트북 전원을 내리고 덮개를 닫고 마우스와 키보드를 분리하고 다시 노트북 스탠드를 휴대용 망원경 접듯이 그렇게 작은 부피로 줄이고 가방 안에 차곡차곡 넣었다. 아마도 폐점시간이 가까웠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그 많은 장비들이 어떻게 12인치 정도의 가방에 모두 들어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 남자는 남은 음료와 모두 마셔버리고 책상 위에 놓인 쓰레기 등을 버리더니 유유히 자리를 떴다. 마치 루이스 캐럴의 소설에 나오는 체셔 고양이가 사라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