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사라지자, 나도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남자처럼 요란스러운 장비는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그보다 동작이 훨씬 굼뜨고 느렸다. 어쩌면 나는 이미 많은 장비 따위들을 몸에 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이 때로 보이는 것들보다 더 무게가 나간다.
일단 스타벅스에서 탈출하긴 했는데, 딱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의식 없이, 목적 없이 구천을 배회하는 원혼처럼 여기저기를 떠돌고 싶었다. 일단, 르네상스 사거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압구정동까지 터벅터벅 걸어보기로 했다. 왜 압구정동까지 걸어가야 하는지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순히 여기에서 거기까지 직선이었기 때문에, 지름길을 찾아야 하는 수고스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 옆길로 새는 것보다는 덜 고단할 것이라는 어떤 낙관적 전망에 나는 접착되어 간 것이다.
몇 번 언덕을 넘고 몇 번의 사거리를 지나쳐 압구정역 주변에 도착했다. 분명히 직선이었고 시간상으로 따지면 1시간 내외가 소요되어야 마땅하지만, 나는 의도대로 직진하지 못했다. 가다가 나도 모르게 옆길로 흡수되어서 부자들이 사는 언덕 높고 담장도 지나치게 높은 마을을 동경하며 지나가기도 했고, 무의식적으로 좁은 골목길을 우회해서 멀리 지나다니기도 했다. 아마도 나는 왼쪽으로 한참을 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겨우 방향을 선회했으리라. 그러다 운 좋게 압구정동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시간을 보니 거의 3시간이 지났다. 3시간 동안 나는 강남 일대의 주택가와 넓고 좁은 골목길을 누비고 다녔지만 머릿속에 각인된 것은 없었다. 내 머릿속에 남은 게 하나도 없어서 나는 마치 진공 속을 걸어 다닌 기분이었다. 지금 현재 텅 비어 있는 내 삶처럼 나는 어딘가에 좌초하고 있었으며, 끊임없는 방황의 수렁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구체적으로 방향을 획득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지극히 우뇌적이고 즉흥적이며 직관적인 감성을 지닌 인물로서, 목적을 미리 세워두고 그것에 따라 충실하게 삶의 추상적인 것들을 구체화시키는 형태, 즉 충분히 예측이 되는 전형적인 생활을 꾸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내 본성이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철학이자 방식이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그 삶의 방식을 무시당했다. 녀석은 나를 고의적으로 유린하려 했다. 단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목에 내가 서 있었다는 거 자체로 나는 장애물 취급을 당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의 의도된 행위대로 그 길목에서 치워졌다. 그저 빗자루질 한 방에 나는 길에서 원래 없던 존재가 된 것이다.
시간을 확인하니 이미 자정을 넘어선 모양이었다. 그런 시간 따위는 원래 나의 의사 없이 제멋대로 흘러간다.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니 나는 시간 따위를 붙들려할 의지도 그것에 예속될 의사도 없다. 어디로 가든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가면 되는 것이다.
성수대교 남단 쪽으로 방향을 서서히 틀었다. 어느 순간 나는 내 의식에서 다소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과연 나는 나를 통제하고 있는 걸까. 삶은 이렇게 불확실한 것으로 계속 변화의 탈피를 벗고 있는데, 나는 그 흐름에 맞게 적응은 하고 있는 걸까. 삶이 나를 통제하는 걸까. 내가 삶을 통제하는 걸까. 내가 삶을 통제하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성수대교를 오로지 내 힘만으로 이렇게 건너가려는 걸까. 그곳엔 의도된 그 무엇이 존재할까. 단순한 변칙성에 불과할까.
나는 성수대교 남단에 올라 좁은 난간을 옆에 끼고 걸었다. 자정이 넘은 한강은 참으로 잔잔했으나 잔잔함 밑에는 어떤 난폭한 고요가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 등을 살짝 건들면 화들짝 잠에서 깨어나 온갖 짜증을 부려대는 유형의 사내처럼, 한강은 내 발밑에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그런 짜증이 가득 찬 사내와 다를 바 없었다. 모두가 폭풍 속의 전야제 속에 숨어 있었다. 누구든 언제든 튀어나와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고 존재감을 과시한다. 나는 그러한 존재 속에서 존재감 없는 거의 무에 가까운 인간이다.
그렇게 잔잔하게 잠들어버린 한강 위의 수면을 바라보다, 또 왼쪽으로 맹렬하게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오고 가는 폭력적인 흐름을 지켜보며 우두커니 앞쪽으로 걷다가, 몇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인간의 형체를 목격했다. 그 사람은 난간에 허리를 바짝 들이대고 허리를 난간 위에 포갠 채, 마치 시소처럼 위태로운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몸을 앞으로 때로 뒤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탓에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사람의 오른쪽 얼굴은 대충 어떤 표정을 지을지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 표정이란 것에는 어떤 목적성, 그러니까 삶의 의미 같은 소중한 것이 완벽하게 소거된 상태였다. 사람의 실루엣이 분명하지만 어쩌면 허수아비라고 정의할 수도, 혹은 사람이지만 곧 사람이 아닌 형상으로 변해갈 그 무엇의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위태롭게 흔들흔들거리다 그 사람은 그대로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시소의 균형은 에너지가 줄어들수록 안정화된다. 에너지가 더 가열될수록 시소는 균형을 잃고 더 심각하게 에너지가 집중되면 지지대를 무너뜨리고 몰락을 경험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 인간의 에너지는 몰락을 알면서도 그쪽으로 폭주했던 것이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한강의 검은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뤄진 일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한강 다리를 건너가다 무심하게 걸음을 멈추곤, 어떤 희망적인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진 나머지, 검은 강물을 감격스럽게 구경하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흔히 목격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에 나는 목격자 혹은 조연이 되고 어떤 사람은 주연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한강의 검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주위는 지나치게 적막했다. 더 큰 규모의 고요가 더 작은 고요를 삼켜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강물의 일렁임조차 없었다. 작은 소용돌이도 일지 않았다. 다이빙 선수가 완벽한 자세로 수면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 사람도 존재감을 어느 순간 놓아버린 것이다.
나는 그 순간, 인간이란 건 어느 순간 쉽게 내가 존재하던 세상과 이별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새삼 직감했다. 생과 사가 한 순간에 결정된다는 것, 그것을 타의적인 게 아니라 자의적인 것으로 결정짓는 중대한 행위가,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궁극적인 선택에 있어서 가장 유효한 것이 아닌가 싶은…
나는 스마트폰을 들고 난간에 쓰여 있는 긴급 전화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여기 성수대교 북단 어디선가, 어떤 사람이 한강에 뛰어들었다고 신고했다. 신고받은 사람은 일단 허위신고인지 판단했고 한강에서 매일 뛰어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확인하려고만 했다. 죽음이란 이렇게 매일 벌어지는 일일 행사 같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