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17화 : 방황 2

소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6화 : 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7화 : 길박사의 족집게 강의

제8화 : 배신

제9화 : 김대리의 제안

제10화 : 개선 작업

제11화 : 꿈의 암시 작용

제12화 : 미행 1

제13화 : 미행 2

제14화 : 미행 3

제15화 : 미행 4

제16화 : 방황 1




"신고하시는 분 인적 사항 간단하게 불러주시겠습니까?" 그는 내 신분부터 확인하려 들었다. 그러니까 허위 신고가 아닌지 형식적인 절차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매뉴얼대로 행동했던 것이다. 나는 누구누구라고 어느 정도까지 자세히 설명해야 할지 몰랐지만, 이름과 나이와 같은 누가 알아도 상관없는 그런 의미 없는 것들을 불러줬다. 그는 "감사합니다. 곧 관계자가 출동할 겁니다. 신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성수 대교 중간쯤에 서서 내가 정말로 실제상황을 목격한 것인지 내 머릿속을 다시 한번 정돈했다. 나는 '어떤 기이한 환영이 비춘 미러 같은 정보를 잠시 엿본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본 것은 과거 어느 순간, 난간 자재 어딘가에 각인된 잔상이 아주 우연하게 영사기에서 재상영된 것처럼, 그렇게 분사된 형태가 아니었을까.' 라고.


그 환영은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장면적 우연에 불과했을까. 나도 낯선 그 혹은 그녀처럼 똑같은 방식의 미래가 주어질 거라는 어떤 필연적인, 혹은 비관적인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있다고 그 파도에 순응하라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 같은 것이었을까.


한강은 역시 유유히 그리고 마치 수면 상태에 접어든 거인처럼 커다란 숨을 가다듬더니 조심스럽게 흘렀다. 아니 어쩌면 시간은 정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리라. 나는 오래도록 고개를 처박고 난간 끝에 지탱해서 역사의 짧은 페이지 같은 것을 지켜봤다.


그때 순찰차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혹시 이곳에서 자살을 목격했다고 신고하신 분인가요?”그는 앞창을 반만 내린 채로 물어봤다. 그리고 불안한 눈으로 혹시 내가 미리 신고하고 뛰어드는 사람이 아닌지 의심하는 태도로 나에게 의미 없는 질문들을 계속 던졌다.


“이 시간에 한강을 건너가는 사람은 드문 편이죠. 보통 이 시간에 한강을 건너가는 사람은 분명한 목적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라고. 나는 그런 목적 따위는 애초에 설정해 두지 않았다. 나는 변칙적인 상황을 좋아하고 이런 무작위스러운 판단을 더 선호하는 사람일 뿐이니까. 그렇다고 내가 방금 일어난 사건을 반긴다는 건 아니다. 변칙적인 걸 선호한다고 해도, 그것은 나의 일이지 타인이 주도하는 사건에 휘말리는 건 또 혐오하니까.


순찰차에서 경찰 한 명이 내렸다. 그의 오른쪽 허리에는 권총이 달린 지갑이 두툼하게 걸쳐져 있었다. 그 경찰은 자신의 허리에 각별한 신경을 쓰며 난간 옆 그러니까 내가 서 있는 곳에까지 다소 주춤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런 날, 특히 밤안개가 낮게 깔리는 날은 더 인명사고가 잦은 편이에요. 사람들이 기분 나쁜 선택을 즉흥적으로 하는 편이라는 거죠. 늘 순찰을 돌긴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고가 터진다니까요.” 그는 늘 긴장 속에 산다고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요. 오늘 같은 날은 오늘이 아니어도 언제나 있겠죠. 이유야 언제나 적당하게 갖다 붙이고 타당하다고 주장하면 그만이니까요. 나는 내 정신을 어딘가에 유배당하고 출타한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경찰에게 말했다. 경찰은 시꺼먼 강물 아래쪽은 애써 외면하며, 이곳에 떨어진다면 도저히 수영으로는 헤어 나올 가망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처럼 실눈으로 강물을 쳐다봤다.


“신고가 들어갔으니 해난 구조대가 곧 출동할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산 채로 발견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하류로 떠밀려와서 운 좋게 찾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저 아래 수초에 발이 붙들려 더 깊은 바닥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비참한 결말이죠. 죽고 나서도 절대 발견되지 않을 확률이 0에 수렴하니까요. 결국 신원불상, 죽더라도 그 죽음을 증거 할 방법이 전혀 없는 셈이죠. 불행한 죽음, 불행한 결말이죠.” 경찰은 그런 죽음을 무수하게 자주 겪어봤다는 투로 억양 없이 말했다.


“그렇군요. 저는 그럼 갈길을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경찰은 “혹시 선생님도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건 아니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 시간에 한강을 도보로 건너가는 사람은 특별한 목적이 없는 경우는 없는 편이거든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그렇게 강한 심장을 소유한 인간도 아니고, 수초에 발이 묶이고 싶은 심정도 아니거든요. 게다가 비참하게 고기밥이 되고 싶지도 않고요. 저는 그만 이만…”


나는 단문을 경찰에게 남기고 길을 떠났다. 걸어가면서도 속으로 한강으로 몸을 던진 사람이 현상 내의 일인지 아니면 현상 바깥에서 주관하는 일인지 의심이 들었다. 요즘 들어서 상상하지 못할 일들이 지속적으로 내 경계 바깥에서 안 쪽으로 파고들고 있다. 김대리는 내 삶을 무너뜨렸고 그 일 때문에 오늘만 하더라도 나는 녀석(김대리)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서 한동안 그의 집을 조사라도 하듯이 이리저리 들추고 다녔다. 그리고 김대리와 믿었던 길박사의 은밀한 협력까지 듣고 말았다.


믿을만한 사람이 주변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오직 나만이 믿을 대상인데, 내가 보고 느끼는 것까지 과연 진실된 것인지 믿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온통 의혹투성이가 아닌가.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입력되어서 그랬을까.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다리 한가운데에는 버스 정류장도 없고 택시를 불러 세울 수도 없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저 끝쪽을 향해서 무던하게 걸어가는 일뿐이다.


성수대교 북단쯤 도착했을 때, 강렬한 바람이 상류 쪽에서 낮게 불어왔다. 나는 바람에 쓸려 날아가는 저 앞의 존재감을 상실한 나뭇잎처럼 맥아리 없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져야 한다. 힘없이 누군가의 외압에 피폭당하고 의지를 상실하더라도, 또한 방향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꾸준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일 테니.


한강을 오로지 다리에 의지해서 건너고 다시 자양동까지 걸어갔다. 자양동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쯤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혹시 누군가 내 집에 침입이라고 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어, 손잡이를 괜히 좌우로 흔들어봤다. 어쩌면 김대리가 내 거실에 앉아서 두 눈을 부릅뜨고 내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방어태세에 대해 생각하면서 만에 하나라도 김대리가 안쪽에서 튀어나올 경우, 그것을 막아내려면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게 좋을지 잠시 상상해봤다. 하지만 문을 돌렸을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형국이 펼쳐지고 있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제16화 : 방황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