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내 방엔 원래 이렇다 할 가구도 인테리어 용품 같은 것도 없다. 주방엔 작은 접이식 식탁 테이블이 덩그러니 놓여있고 그것도 재활용 센터에서 공짜로 얻어온 물건이다. 거실이자 안방의 역할을 동시에 담당하는 한 평 정도의 공간에는 2열짜리 책장이 하나 있어서 컬렉션이랄 것도 없지만 어쨌든 특색 없는 책들이 어지럽게 꽂혀 있다. 그것도 얼마 전에 봄을 맞아서 정리해보겠다고 바닥에 책탑을 쌓아놓아서 정리되지 못한 상태다. 게다가 책상 서랍 안의 온갖 잡동사니도 모조리 꺼내놓아서 몸 누울 자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러니까 완벽하게 방치된 공간에 불과했다.
책장 옆에는 원래 이 집에 있었던 작은 수납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는 얇은 이불이 두어 장 걸쳐져 있고, 그 수납장 옆에는 언제든 떠날 수 있게끔 준비된 여행용 커리어가 놓여 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내가 목격한 것은 완벽하게 파괴된, 마치 옛 영광을 오로지 역사만으로 증명할 뿐인, 그런 폐허를 증명할 뿐인 물건들이 해체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흉물스러웠던 책상은 누가 도끼로 내리친 것처럼 거의 1/4조각으로 박살 나 있었고, 아끼던 일본제 샤프, 연필, 캘리 용품들은 모두 부러져 쓸모없는 신세가 됐고, 죄 없는 노트와 A4용지 따위도 모두 짓이겨져 있었다.
심지어 냉장고는 앞쪽으로 자빠져서 그 안에 들어있던 것들이 마치 스스로의 내용물을 게워놓은 것처럼 바닥에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으며, 깨질 수 있는 모든 물건들, 이를테면 유리, 접시, 머그컵, 쟁반 따위들은 누가 일부러 벽에 전속력으로 던지기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제각각의 모양으로 분해된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으나 일정한 계획을 가지고 아주 체계적으로 작업을 펼친 모양이었다. 싱크대는 간신히 벽에 걸린 채 덜렁덜렁거리다, 마침 내가 집에 도착하자 주인을 보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다가 눈을 감듯이 바닥으로 주저앉아 버렸으며, 베란다의 모든 창들엔 스카치테이프가 덕지덕지 발라져 있었는데, 그것은 유리를 박살 냈을 때, 바깥으로 유리조각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특별하게 배려된 것이었다.
이런 일을 저지를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까지 내 환경을 마치 불도저로 밀어버릴 것처럼 의도적으로 파괴시킬 사람도 없다. 이것은 작정하고 일부러 벌인 짓이다. 나라는 인간을 말살하기 위해.
나는 비교적 멀쩡한 자리를 발견하곤 그 위에 멍하게 앉았다. 형광등이 매달려 있던 한쪽 줄이 떨어져 역시 덜렁거렸지만 다행히 불은 이상 없이 들어왔다. 침입자의 마지막 배려였을까.
이것은 어떤 의도일까? 녀석의 집에 무단 침입한 것에 대한 일종의 경고 시그널일까. 분명 나는 일말의 의혹 없이 그의 집에 안전하게 들어왔다 나왔다. 복층 침대 밑에 누워서 심지어 낮잠까지 자버렸지만 운 좋게 들키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원인 모를 정체가 내 집 문을 따고 들어와서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집안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물건은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이 따위 물건들은 재활용 센터에서도 취급하지 않는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물건들조차 이제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간다. 모든 게 쑥대밭이다.
그렇다고 물증도 없는 김대리에게 전화를 걸어서 따져볼 수도 없다. 피차일반인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내가 더 일방적으로 당한 기분이 들었다. 단지 김대리가 나를 몰락시키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치밀한 작업을 펼쳐왔다는 사실 하나만 파악했을 뿐이다. 어쩌면 김대리는 내가 다시 한번 녀석의 공간에 침입해주길 기다릴지도 모른다.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입을 쩍 벌리고 자신의 소굴로 입장할 물고기들을 사냥하기 위해 무한히 인내하는 것처럼, 녀석은 그곳에 진을 치고 내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결국 이 싸움 판에서 일단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결국 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난잡하게 어지럽혀진 물건 들 중에서 쓸만한 것들이 있는지 그것부터 뒤져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챙긴 다음, 날이 밝으면 즉시 이곳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서울, 자양동이 아닌 그 어떤 곳이든 상관없었기 때문에, 나를 파괴시키려 하는 모든 행동으로부터 달아날 수만 있다면…
나는 배낭에 핸드폰 충전기, 여분의 배터리, 노트북 하나, 멀쩡한 속옷 그리고 쓰러진 냉장고 더미에서 찾아낸 단백질 바를 몇 개 대충 가방에 쑤셔놓곤 바로 남부 터미널로 향했다. 집에서 나서는데 이미 해가 높은 곳에 떠 있었다. 황금빛 태양이 바람에 의지한 채 넘실거리고 있었다. 온통 세상이 넘실넘실 노란 빛깔로 춤을 추고 있었다. 내 눈엔 그 모든 장면이 어색해 보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