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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은 언어로 만든 추상적 구조물을 변하게 하는가?

인공지능 길들이기

by 안영회 습작

<제비와 비둘기의 비유: 피할 수 없는 AI-환경>에 이어서 <먼저 온 미래>의 5장 <언어라는 도구 너머에서>를 읽고 쓰는 글입니다.[1]


기풍의 소멸과 개성의 균질화

바둑을 둔 적이 없지만, 기풍이라는 말은 어쩐지 알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바둑계에 인공지능이 도입돼서 가장 아쉬운 점이 뭔가요?" 나는 여러 프로기사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기풍이 사라졌다'라는 답을 가장 많이 들었다. 한국기원의 바둑용어 사전은 기풍(棋風)을 "바둑을 두는 데 있어서 나타나는 각 개인 특유의 방식이나 개성"이라고 설명한다. AI 포석을 암기한 기사들은 초반을 모두 비슷하게 둔다. 그러므로 기사들의 개성은 사라졌고, 그것이 아쉬운 일이라는 얘기다.

개성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달은 저로서는 기풍을 아쉬워하는 입장에 크게 공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긴 시간 올바른 설계와 효율적인 프로세스 따위를 추종해 왔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기풍이 사라진 바둑계에 대한 아쉬움을 이렇게 혹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은 누가 더 Al 수법을 더 잘 암기하느냐의 승부가 돼버렸어요.

김효정 3단은 인공 지능 이전의 바둑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듯한 인터뷰를 했습디다.

나만의 뭔가를 만들어 내는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안성문 바둑전문기자의 말속에도 비슷한 아쉬움이 느껴집니다.

"요즘은 기풍 이야기 안 하잖아요. 박정환 9단과 최철한 9단의 차이를 아세요? 신민준 9단과 강동윤 9단의 차이를 아십니까? 모르잖아요. 기사들의 기풍이 없어지니까 영웅적인 캐릭터도 만들어지지 않아요. 누구는 몇 위, 누구는 몇 위, 그런 얘기밖에 안 해요. 랭킹 10위권에 있는 선수들인데도 차별화가 안 되니까 그냥 뭉뚱그려서 보게 돼요."


기풍이 정말 사라졌는가? 개성의 새로운 형태

오히려 인공지능 덕분에 바둑이 재미있어졌다는 이희성 9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풍이 많았다는 건 그만큼 기사들이 자유로웠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중략> 그런데 인공지능이 나오면서 이제 모든 수의 이길 확률이 수치로 표시되잖아요.

이길 확률을 보면서 예전의 기풍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기풍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저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기풍은 어떤 기사가 본인을 증명하는 방법이죠. 그런데 그런 캐릭터나 퍼스낼리티라는 건 승부에 비하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저도 해설을 하지만 저는 바둑의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을 쓰지도 않고,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어떤 바둑이 아름답고 어떤 바둑이 아름답지 않다는 건지요? 최선을 다한 바둑에는 다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자는 기풍에 대한 견해 차이를 조사하며 바둑에 대한 인식 차이를 발견한 듯합니다.

'바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심오한 인식 차이에서 온다.

유창혁 9단은 초판 포석은 기풍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기풍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인공 지능이 도입되면서 바둑이 굉장히 복잡해졌어요. 예전에는 어떤 틀에 의해서, 돌의 모양을 중시했는데 요즘은 그런 틀이 무너졌고 난전이 많습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도 어렵고 두는 사람도 어려워지는 상황이죠."

김만수 8단은 인공 지능 2.0 시대를 선도하는 젊은 기사들에게서 새로운 기풍이 보인다고 주장합니다.

"이길 확률이 50퍼센트 이상인 수 중에서는 가장 수치가 높은 수를 택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수를 택하는 거예요. AI가 이길 확률이 63퍼센트, 58퍼센트, 51퍼센트, 47퍼센트인 수를 제시하면 47퍼센트인 수는 버리지만 51퍼센트인 수는 고를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자기의 개성을 뽑아내는 거죠. 그래서 지금은 기풍이라는 게 은근히 있어요."

김지석 9단의 견해도 비슷합니다.

제가 53퍼센트짜리 수에 대해서는 모양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고, 50퍼센트짜리 수에 대해서는 그래도 비교적 이해를 하고 있다면 '이해도' 같은 변수를 넣어서 값을 보정해야 할 것 같아요. 어차피 바둑은 제가 둬야 하는 거잖아요.


‘기풍’이라는 언어의 모호함과 인간적 비유

많은 기사들의 인터뷰 끝에 내린 저자의 결론이 등장합니다.

'기풍이라는 단어가 문제'라는 게 내 대답이다. 이 단어는 명확히 정의되어 있지 않았다.

앞서 살펴본 유창혁 9단과 정확히 반대되는 견해도 있습니다.

안성문 바둑전문기자는 "기풍은 (경향성이 아니라) 초반 구상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중략> "바둑이 중반에 들어가면 이미 그때는 오로지 최선이냐 아니냐의 치열한 칼싸움 같은 거예요. 구상은 50수, 길게 보면 80수 안에 있는 거죠. 한 기사가 자기 스타일대로 초반 빌드업을 하는 과정에서 기풍이 나오는 거죠. 중반에 들어가면 치고받을 때 선택의 문제는 있겠지만 그건 기풍이 아니에요." "그런 선택을 기풍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단어 뜻을 오해하는 것”이라고 안 기자는 단언했다.

저자는 질문을 던집니다.

기풍은 도대체 무엇인가? 경향성인가, 성격인가, 철학인가, 세계관인가?

그러더니 놀라운 다음 종착지에 도착합니다.

결국 바둑계에서 사용해 온 '기풍'이라는 단어는 현실 세계의 특정한 현상에 대한 모호한 비유였다. 따지고 보면 '성격'이나 '철학'이라는 단어 역시 그렇다. 인간은 그런 개념어와 비유에 기대어 세계를 파악한다. 언어는 도구다.

언어가 도구라는 듣고 보면 당연하지만, 흔히 떠올리지 않는 생각이죠.

그 도구에 기대지 않는 인공지능이 언어라는 도구에 기대야만 하는 인간들보다 더 훌륭하게 과제들을 수행할 때, 언어에는 균열이 생긴다.

나아가 '언어적 일관성'에 의존하지만 '확률론적 모델링'을 통한 언어 생성으로 혹자는 반(反)지능이라 일컫는 인공지능의 특성을 떠올립니다.

그 결과 들쭉날쭉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고, 언젠가 인간을 능가하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런 지점에 도달하면 우리가 써 온 언어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고 저자를 이를 균열이라 말합니다.


어쩌면 언어의 균열은 <듀얼 브레인>을 읽으며 <인공지능은 새로운 표현 방식과 언어를 제공한다>고 느꼈던 일과 비슷한 현상인 듯합니다. 이어서 다음 문장을 읽을 때는 너무나 부정교한 말로 업무를 위임하는 행태를 사유했던 2015년이 떠오릅니다.

이렇듯 쪼개서 생각하면 완전히 다른 여러 의미를 지닌 단어지만, 사람들은 기세라는 말을 쓰면서 별로 혼란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태껏 그냥 섞어서 써왔고, 서로 다른 의미를 왜 한 단어로 부르냐고 불만을 표하는 이도 없었다.

어쩌면 인공지능은 전혀 다른 방식의 소통으로 우리의 협업을 이끌어 갈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언어와 지능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확인하기

프로그래머들은 이미 은유를 생각의 도구로 널리 쓰고 있습니다.

기준이 없는 개념은 비유로서, 흐릿하고 모호하게 존재한다. 인간은 그런 비유를 도구 삼아 사유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학자가 아닌 다음에는 특정한 소통은 대부분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의인화 그리고 그와 매우 유사한 신격화는 긴 시간 절대다수를 복종시켜 온 종교의 바탕이 됩니다.

인격이 없는 대상에 인격을 부여하는, 전형적인 인간의 언어였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수많은 사물을 의인화하고, 상상의 감정이나 성격을 만들어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이입한다.

종교를 만든 언어의 약점을 생각해 보니 인공지능에 의한 파멸을 외치는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인공지능이 과학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당연히 알파고는 그런 걸 생각하지 않는다. 알파고의 모든 수는 계산의 결과다.

한편, 다음 문장에서 낯익은 내용을 만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지능이 무엇인지 그 자체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에서 배운 의식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알게 된 탓이죠.


언어, 지능, 그리고 블랙박스의 한계

한편, 다음 문자에서 다시 한번 <사피엔스>에서 배운 '인지혁명'의 중심에 있는 도구인 말을 되새깁니다.

블랙박스인 인간의 뇌는 자신이 작동하는 방식을 다른 인간의 뇌에 전파하기 위해, 즉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 언어를 쓴다.

더불어 말의 쓰임이 자신의 내면이나 몸이 아니라 타인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그들의 내면을 향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말에 대해 놀랍도록 무지했다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적당히 편의적인 정의를 내려서 적당히 쓰고 있는 것들이 엄청 많아요.

정교하지 않은 언어를 쓰는 이유를 이제야 안 듯하기 때문이죠. 말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말의 쓰임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인공지능이라는 블랙박스가 지켜야 할 규칙과 내야 할 결과물을 명확히 규정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시도를 거듭할 때마다 점점 성장해서 더 나은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피드백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말의 쓰임을 알수록 인공지능을 어떻게 쓸지에 대해서도 영감이 생기는 듯합니다. 하지만, 다음 문장을 읽고 나서는 다른 생각이 듭니다.

'많이 팔리는 소설을 써라'라는 명령은 간명한 목표가 된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책들을 분석하고, 패턴 인식 능력으로 거기서 공통점을 추출하여, 결과물을 내고, 그 결과물이 베스트셀러 순위의 어디쯤에 오르는지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간단한 말 몇 마디로 무척이나 복잡해 보이던 일이 해결되는 것은 언어라는 도구의 활용과는 다른 문제란 생각이 듭니다.


AI 창작의 확산과 인간 예술의 경계

인공지능이 피드백을 통해 인간을 증강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물건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으면(음원을 유튜브에 올려놓는 일까지 포함해서) 소비자의 반응이라는 피드백을 얻는다. 판매량이나 조회수 같은 구체적인 수치로 그 피드백을 규정할 수 있다.

다만 생산 주체가 바뀔 수 있습니다.

Al 활용 음원 생산 시스템에서 인공지능이 활약하는 곳은 작곡과 편곡, 가창, 연주, 믹싱, 마케팅 기획 등이다.

어찌 보면 기차나 자동차의 첫 등장도 비슷한 혼란을 과거의 인류에게 주었을 듯합니다.

롯데마트는 매장에서 트는 배경음악을 인공지능으로 만들었는데 작곡, 작사, 가창을 모두 인공지능에게 맡겼다. 세 곡을 만드는 데 기획에서 제작까지 이틀이 걸렸고, 비용은 인간 뮤지션을 이용하던 기존 방식의 10분의 1밖에 들지 않았다.

추상적인 구조물을 밑바닥부터 분해한다는 표현이 인상 깊습니다.

약인공지능은 인간이 언어로 만들어 놓은 추상적 구조물들을 밑바닥에서부터 분해하고, 그 구조물의 어떤 부분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 것 같다. 인간은 여러 분야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이해하고 그 아래 있는 듯한 패턴을 파악하기 위해 개념어와 비유를 동원해 설명을 만들었다. 그 설명에 의존해 행동 규칙을 세웠고, 그에 따라 일한다. 예술 분야에서뿐만 아니다. 경영 이론, 경제 이론, 사회 이론, 정치 이론, 교육 이론 같은 것들이 다 거기에 해당한다.


주석

[1] 이번에도 앞선 글들과 같이 우선 밑줄 친 내용을 모아서 인공지능에게 전달한 후에 주제를 받아보고 전체 구성을 결정하기로 합니다.


<먼저 온 미래>를 읽고 쓴 글

1.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은 먼저 온 미래였다

2. 인공지능과 공존을 강요당할 창작의 미래

3. 프로 기사의 긍지와 자신감 상실 그리고 AI 동반자화

4. 제비와 비둘기의 비유: 피할 수 없는 AI-환경


지난 인공지능 길들이기 연재

(2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21. 모든 브레인스토밍은 항상 AI를 활용한다

22.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은 먼저 온 미래였다

23. 포토샵 대신 나노바나나로 갈아타는 첫 발을 떼다

24. 페르소나를 이용해 다른 사람의 재주를 모방하기

25. 다음에 나오는 단어를 예측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가?

26. 인공지능이 반드시 가야 할 길이 있을까?

27. 인공지능은 새로운 표현 방식과 언어를 제공한다

28. 다양한 수준에서 AI에 따른 직업의 변화를 면밀히 보자

29. 인공지능의 들쭉날쭉함을 포용하기

30. 인공지능과 공존을 강요 당할 창작의 미래

31. 인공지능은 허구적 믿음을 이식받은 놀라운 기계

32. 프로 기사의 긍지와 자신감 상실 그리고 AI 동반자화

33. 제비와 비둘기의 비유: 피할 수 없는 AI-환경

34. 인력을 유지하면서 AI를 이용해 생산량을 늘리자

35. 인공지능은 사회 시스템을 바꿀 것이다

36.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은 어때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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