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고헤이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읽기
노동자가 생산했는데 잉여가치 6000엔은 자본가의 것입니
다. 이런 불합리가 자본주의에서는 정당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착취’라는 문제입니다. 마르크스는 착취가 발생하는
이유를 ‘노동력’과 ‘노동’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노동력’은 노동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
이에서 등가로 매매되는 것은 이 ‘노동력’입니다. ‘당신 곁에서
일하겠습니다‘라는 권리를 파는 것입니다. 그리고 1만 엔이라는
일당은 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하루 가치에 상응하는 대가입
니다.
그러나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일당 1만 엔에 팔겠다’고
결심한 시점, 혹은 자본가가 그것을 사기로 결정한 시점에서는
아직 ‘노동’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구입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실제로 사용해야 (즉, 노동자를 일
하게 해야) 비로소 ‘노동’이 발생하는데, 1만 6000엔이라는 새로
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바로 이 ‘노동’입니다.
이때 일당 1만 엔의 노동력은 이미 자본가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자본가의 자유입니다. 극단
적으로 말하면, 사용하지 않고 1만 엔을 낭비해도 좋고, 여덟 시
간 노동을 시켜 1만 6000엔의 가치를 손에 넣어도 좋습니다. 즉,
일단 노동력을 팔아 버리면 그동안 재량권을 갖는 이도, 노동이
만들어 낸 잉여가치를 수취하는 이도 자본가이지 노동자는 아
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본가는 ‘노동’이라는 상품을 노동자로
부터 사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대한 대가로 임
금을 지불한다는 점입니다. 즉, 노동자를 속여 싸게 사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시장에서의 거래만 놓고 보면, 상품의 등가교환
원칙은 노동력 상품과 임금의 교환에서도 제대로 지켜집니다.
그 결과 잉여가치의 ‘착취’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착취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자본론』의 목적은
아닙니다. 이 점은 종종 오해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
히려 물어야 할 것은 착취의 존재가 드러났는데도 왜 노동자들
은 묵묵히 일을 계속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잠정적으로 간단히 답한다면, 노동자에게는 자신의 노동력
을 계속 파는 것 말고는 생존에 필요한 화폐를 얻을 방법이 없
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노동자가 가진 상품은 자신의 ‘노동력’
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팔아야만 합니다. 생산수단도 생활수
단도 없는 무소유의 존재, 그것이 바로 노동자입니다.
하지만 이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로 받을 수 있는 임금은 겨
우 먹고살기에도 빠듯한 액수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퇴
근길에 하이볼 캔을 한 손에 들고 마트에서 할인 스티커가 붙은
반찬을 찾아다니며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것입니다.
[출처]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지음, 정성진 옮김, arte 2024, 69~70.
2024.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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