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에 대한 이해가 외국어 공부의 척도
3. 외국어 공부에 좋은 드라마 : 결혼으로 배우는 일본어
이번에는 약속드린 대로 일본어 편입니다.
저는 일본어를 좀 희한하게 배운 편이라, 초등학교 4학년 때 무역회사를 운영하시는 아버지 친구분께서 드래곤볼 1권부터 15권까지를 선물로 주셨어요. 그때가 한국에 드래곤볼이 발매는커녕 소개도 되기 전인데 당시에는 애라서 그냥 멋모르고 장식만 해뒀죠. 하지만 후에 서울문화사의 잡지 아이큐 점프에서 드래곤볼이 연재되었고, 그때 흥미를 느껴서 쟁여놓은 만화를 보기 위해 일본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일본어 공부방법은 무식했어요. 초등학생의 흥미를 위해 가뜩이나 희소한데다 비싼 일본어 학원을 보낼 수는 없었고 그래서 저는 세배돈을 털어, 서점에서 일본어 사전을 사서 그걸 가지고 공부했습니다.
과정은 굉장히 심난(?) 하기도 하고 재미(?) 있었습니다. 저는 퍼즐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우선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모두 외우고, 그다음에는 만화에 나오는 모든 단어를 사전에 찾고 노트에 적는 거예요. 아무래도 반복되는 단어가 많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사전을 찾는 빈도가 줄어들고, 이야기의 전개가 확 바뀌지 않는 한 사전 보는 빈도가 크게 줄어들게 됩니다.
처음에는 모든 단어를 찾아야 했지만 나중에는 아는 단어를 짜 맞추는 퍼즐식으로 바뀌었고 어느새 정신 차려보니 중2 때는 일본의 잡지 소년 점프를 슥슥 보고 있었네요. 고1때는 JLPT 1급을 딸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통번역 대학원 전문 일본어 학원, 구청문화센터의 고급과정 등을 다니면서 다져나간 기억이 나네요.
물론 이런 공부방법은 초기에 흥미를 다진다면 모를까, 지금 권하기는 그렇고 권할필요도 없는 방법입니다. 제가 일어를 배우기 시작한지 30년, 좋은 교육방법은 이제 넘쳐나는 세상이니까요.
아니 오히려 단순한 교육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바라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자라면서 인간관계를 맺다 보니 의외로 저처럼 일본어를 배운 분들이 제법 됩니다. 관심이 가는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때문에 사전을 사서 끼고 살면서 외운거죠. 개중에는 아예 몇 페이지의 무슨단어가 있는지 외운 사람도 있어요.
이런 분들의 특징은 거의 사전을 씹어먹은 셈이라 어휘 사용이 다양하다는 것이고, 감이 어릴 때 잡혀서 설령 오랫동안 일본어를 안 써도 잠깐 말해보면 바로 감이 돌아오지요.
문제는 이 이후의 과정입니다. 앞에 영어 편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언어를 배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를 이해하는 것
입니다. 특히 일본어는 생각보다 이 과정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만화책, 소설 그리고 언어교류에서는 거의 들을 일이 없지만 비즈니스 현장에 투입되는 순간 신물 나게 듣는 언어들이 있습니다. 한 예로 전향적인 자세로 검토하겠습니다(前向きの姿勢で検討致します)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보통 제안을 넣으면 2~3일이면 결론이 나오는 편이지만 일본 회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안을 받은 사람이 검토를 하고, 이 내용을 관련 부처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하고 여기서 정리된 내용을 또 윗선에서 검토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로 하나는 '전권이 없다'는 것, 또 하나는 '책임을 지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이야 상당히 옅어졌지만 예전엔 일본의 기업문화에서 회사에 폐를 끼치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굉장히 신중한 업무처리, 책임 안 지는 업무처리가 주가 되었고 그래서 저런 말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저 말을 그대로 풀어보면 '내가 아주 열심히 검토는 해볼 텐데 결과는 몰라'라는 뜻이거든요. 80~90년대 한국 비즈니스맨들이 일본인들과의 비즈니스에서 학을 뗀 이유는 저렇게 회피하는 말을 '승낙'으로 오인하고 회사에 보고했다가 된통 당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문화이해의 과정이 빠진채 한국식 문화에 의식/ 무의식적으로 대입했다가 터지는 사고죠.
문화 문제는 특히 일본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다른 언어가 울고 들어가서 웃도 나오는 반면 일본어는 초반 진입부터 입에 붙는 과정까지는 쉬운데 고급과정이 눈물 납니다. 이 말은 대부분이 초반 과정을 겪고 후반 과정을 잘 겪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해요.
그래서 일본어는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고급 일어를 제대로 말하는 사람은 많고 문화영역까지 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양국의 문화 차이를 이해하고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 드물어요.
저는 일본어를 배울때는 단어, 문법, 용어를 넘어 한국의 일본의 역사, 문화, 사회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가 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토종으로써 일본어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더욱 중요한 과정입니다. 얼핏 보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멀리 보면 더 빨리,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번 일본어 편에선 문화의 흐름을 잡아가면서 언어를 배우는 방법에 대해 적어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사회문제를 5~10년 주기로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봅니다. 극심한 저출산, 노령인구의 증가는 일본에서는 이미 특별하지도 않은 사건이 된 지 오래죠.
이 일본을 답습한다는 것은 제가 오리지널로 말한 것은 아니고 여러 선구자(?)께서 두루 말씀하신 것이죠. 그 트렌드의 효시는 바로 아베 히로시(阿部寛) 주연의 명작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結婚できない男 : 2006)였습니다.
혼자 사는 생활이 좋으며, 나의 수입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나누기 싫다는 주인공 쿠와노의 사상부터 시작, 드라마는 다양한 사람의 결혼관과 애정관을 통해서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것은 물론 독신주의에 대해 다시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이 드라마는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 결혼과 독신에 관한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드라마 이전에는 일본 사람들도 결혼 안 하는 사람에게 색안경을 끼는 상황이었어요. 이는 작품에서 남 주인공 쿠와노, 여 주인공 하야사카를 대하는 주변의 시선에 그대로 담겨있죠. 하지만 이 드라마의 대히트 이후, 일본에서는 1인 전용 고깃집이 창업하는 등 싱글라이프 관련 비즈니스가 성업하게 됩니다. 이상한 사람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하나의 삶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죠.
방영후, 12년이 지난 2018년, 일본의 생애 미혼율은 남성 23%, 여성 14%가 되죠. 그리고 이 문제는 한국으로 그대로 아니 기세를 더해서 옮겨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지진희, 염정화 주연의 리메이크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죠.
방영될 2005년 당시에는 작품의 주제가 워낙 한국과 동떨어져있었던 탓인지 인기가 없었지만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 기준에서도 충격적인 주제였음에도 18~22%의 높은 시청률을 거둔 인기 드라마였습니다. 공감대를 크게 형성한 거죠.
황혼이혼은 일본에서 이미 일상적인 일이 된 지 오래이며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개념의 졸혼(卒婚)이라는 트렌드가 점점 퍼져가고 있지요.
가정을 갖고 안정을 얻고 싶었던 대기업 대일 중공업의 도요하라 코타로는 60세 정년을 맞고 부인에게 세계일주를 제안하지만 부인 요코는 남편에 얽매인 생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찾기 위해, 이해할 수 없는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남편의 제안에 이혼으로 답합니다.
예전 일본에는 '종신고용'이 트렌드였습니다. 경영의 신이라는 마쓰시다 고노스케(松下幸之助)는 직원이 있어야 회사가 있다면서 종신고용제를 도입합니다. 경영위기에도 구조조정을 도입하기는커녕 회사에 기숙사와 편의시설을 완비해서 사람이 회사를 떠나서 생활할 이유가 없는 시스템을 만들었죠. 마쓰시다(현 파나소닉)의 성공은 일본의 다른 기업들이 종신고용제를 벤치마킹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안정적인 것에 의존하는 성향이 있는지라 이 과정에서 회사와 아내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가정을 담당하는 여성의 부담은 커졌고, 특히 회사에 모든 것을 바칠수록 가정과 아내에게는 소홀할 수밖에 없죠. 급여를 집에 가져다주고 먹여 살리면 된다는 남편의 개념, 회사와 일밖에 모르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아내의 갈등이 결국 황혼이혼이라는 트렌드(?)를 낳았습니다.
생애 미혼율 남성 23%, 여성 14%의 일본 사회, 이제 결혼은 남들이 하니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내 인생에 필요한 것인지 따져보고 상대와 의논한 다음에 해야 하는 것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솔로가 문제 있는 사람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솔로에게도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는 '사회의 개인화'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그렇고 한국이 그렇죠.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2016)'는 이런 사회적인 트렌드에 다시 한번 물음을 던지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중개인이 되려고 합니다. 심리학 석사를 졸업했지만 여자로서는 높은 스펙이 취업에 걸림돌이 된 모리야마 미쿠리는 아버지의 지인인 츠자키 히로사마의 가정부로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쿠리의 집이 멀리 이사를 가게 되고, 난데없이 수입원이 사라지게 된 미쿠리는 츠자키에게 계약결혼을 권하는데...
앞에서 말한 드라마들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주로 다루고, 일본 사회의 문제는 소극적으로 다룬다면 이 드라마는 결혼, 연애, 일본 사회라는 모든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취업난, 파견직, 정리해고 등의 사회적인 문제, 전업주부의 노동, 다양한 가족형태의 등장 그리고 성소수자와 고령 처녀 등 우리가 존재함에도 눈을 돌리지 않는 모든 요소를 설득력 있게, 어색하지 않게 다릅니다. 물론 만화인 원작이 수작이기도 했지만 히트 각본가인 노기 아키코(野木亜紀子)의 집필력이 컸습니다.
한국에서는 채널 W에서 이게 한국 드라마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너무 현지화를 잘해놔서 그런지 팬층도 두터운 드라마입니다. 사실 요즘 일본어를 배우신다면 중간 과정으로 이 드라마를 꼭 두셔도 될 정도로 한국사회가 직면한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기도 하고요.
덧붙이자면 이 드라마는 제가 생활, 비즈니스 일본어를 배우는 사람에게 두루 추천하는 작품입니다. 생활 일본어, 연애 일본어, 비즈니스 일본어가 골고루 들어가 있어요. 주인공들의 결혼은 계약결혼이기 때문에 생활을 위장한 계약관계이며 회사 생활, 비즈니스에 관한 용어도 자주 나오거든요. 완전히 종합 선물세트라 문장 자체를 통짜로 외워둬도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최근 일본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일본계 헤드헌팅사의 이사(대표)님께서는 취업에서 가장 활용하기 좋은 언어가 일본어라고 말씀하셨고, 모 유명 중견 IT기업의 대표는 영어는 기본적으로 하는 시대, 일본어가 취업, 나아가 생존의 키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도 하셨죠. 이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브런치 매거진에서 나중에 따로 다뤄보겠습니다(이렇게 홍보를 합니다).
다만 일본어를 배운다면 단순히 일본어를 배우는데서 그치는 게 아니고,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특히 요즘에는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으로만 배우는 분들이 많은데요, 이 양쪽 매체는 일본어에 대한 흥미를 돋우고 기초를 다지는 데는 좋을지 몰라도 일상생활에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의 일본어를 썼다가는 못 배운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습니다. 모두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부는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일본어인 게 사실이거든요.
위의 포스팅은 유머글로 올라왔습니다만 실제로 소녀 말투로만 이야기하는 지인이 있는 저는 웃을 수가 없네요. 의외로 회사 생활하면서 이상한 말투로 일본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그래서 유학파나 통번역전공을 선호하는 것이겠죠).
개인적인 견해지만 스마트폰을 들이대면 바로 실시간으로 번역이 되는 시대에 단순히 언어를 소통의 목적으로만 배우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 해외의 문화와 문물을 이해한 후 좋은 것은 받아들이거나 활용하고 나쁜 것은 배제하는 통찰력과 선구안이 외국어 공부의 주가 될 것으로 봅니다.
최소한 남자가 소녀같은 말투로 말할 이유는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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