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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中道) : 불교는 금욕주의인가?

by 힙스터보살


대중적으로 '종교'라는 말은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한다는 인식이 있다. 특히 불교는 더더욱 그렇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같다. 수행법에 있어서 묵언(默言, 말을 하지 않음)을 한다든가, 금식(禁食)을 하는 방법이 있기도 하고, 스님들은 고기 먹으면 안된다는 계율이 있다는 점도 이러한 인식 강화에 한 몫을 한다.


그런데 내가 이해한 불교는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보일만한 부분이 이해는 간다. 하지만 '불교는 금욕주의적이야'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주무시는 게 아니라 명상 중이신 듯 한데....?


붓다께서는 출가 후 6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다. 맞는 말인데 너무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어서 아쉽다. 그렇다고 깨달음 썰을 다 풀자니 글이 너무 길어져, 내 나름대로 초압축해서 깨달음에 이르신 길을 정리 해 보겠다.


1. 청년 붓다의 문제제기

붓다께서는 왕자로 태어나서 부족함 없이 지내심, 왕자인지라 스승도 꽤 훌륭했음 > 농경축제에 참관했다가 농부와 소가 힘들게 일하는 모습 발견 > 의문이 생김 : 왜 하나를 살리려면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하는가, 세상은 왜이리 불공평한가 > 스승님들이 붓다의 의문을 적절히 풀어주지 못함 > 왕궁 밖에 나갔다가 고통받는 대중의 삶을 발견, 삶 자체가 고통임을 절실히 느낌 > 고통을 잊기 위해 쾌락에 취해보기도 하고,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결혼을 하여 아들도 낳아봄, 왕자의 지위를 이용하여 민중의 고통을 해결 해 보기도 함 > 해결불가, 출가만이 답이라 정하고 실행에 옮김


2. 출가 후 수행생활 및 깨달음의 과정

당시 인도에서 가장 권위있는 종교집단은 브라만. 브라만의 권위에 대항하여 등장한 것이 슈라마나(슈라마나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 사문沙門) > 사문의 지도자를 찾아가 수행함 > 1번 지도자는 고행주의, 행복에 다다르려 고행을 하는데 삶이 고행을 위한 고행이 되버림, 탈락 > 2,3번 지도자는 요가와 명상주의자, 명상으로 해탈에 다다르는 방식을 취함, 근데 일상생활은 늘 명상만 할 순 없잖? 명상을 위한 명상이 되는 데 그치는 한계 발견, 탈락 > 깨달음을 향한 절실함으로 극심한 고행을 결심, 6년간 음식을 극도로 제한하고 몸을 학대 > 정신 잃고 강에 떠내려가서 어느 여인에게 구조됨, 휴식하며 잘 먹고 지내며 중도를 깨닳으심 >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수행정진 시작 with 중도 > 심적 싸움을 견뎌내고 완연한 깨달음 성취 > 그 깨달음을 법문으로 설파하시기 시작 : 중도, 사성제, 팔정도


부처께서 깨달으신 후 설파한 가르침에 '금욕(禁慾)'은 없다. 대신에 '중도(中道)'가 있다. 중도는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상태를 만들라는 것이다. 무조건 양 끝의 중간을 선택하라는 말이 아니다. 너무 자신을 절제로 몰아넣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하고픈 대로만 살라는 말도 아니다.


중도에 이르는 길에 금욕을 해야하는 중간과정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중도에 이르기 위한 방편으로서 금욕을 활용하는 것이지, 금욕을 위한 금욕은 아님을 분명히 하고싶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자.


중앙도서관도 '중도'라고 하죠. 깨달음을 위해 어느 정도는 책을 읽고 여러 함의를 발견 해 내는 과정이 있으면 좋지 싶지 말예요.


불가에서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은, 말 그대로 고기를 섭취하면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어떠한 좋은 맛을 탐하지 말라는 말이다. 때문에 스님이 고기를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그 고기를 먹는 과정에서 '맛있다, 더 먹고싶다'에 먹혀버리면 그게 문제인 것이다. 고기만 문젤까. 나물이 맛있다고 나물만 허버허버 먹으려 드는 것도 탐심이다.


수행자도 사람이다. 당연히 맛있는 거 먹으면 더 먹고싶다는 생각이 들지. 하지만 '한 생각 돌이켜서' 평정심으로 돌아오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심(下心, 내려놓음)하여 내 마음의 초기값 상태를 빠르게 이룩하는 것이다. 만일 초기값으로 되돌아오는 데 매우 능숙해져 그 속도가 대단히 빠르다면, 우리 삶은 거진 늘 평정심에 가까워져 살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물이든 대개의 물에는 모래며 먼지며 불순물에 있다. 그 물을 손쉽게 정화할 때 제일 먼저 거치는 단계가 물을 가만히 두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흐레는 가라앉고 맑은 물이 된다. 마음이 청정한 상태라는 게 이렇게 아닐까? 흐레를 완전히 없앤다면 더없이 좋겠다. 짐작건대 붓다께서는 아예 흐레도 없애버리신 듯하다.


하지만 나는 그까지 갈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고, 마음의 흐레가 올라와서 괴로운 것 정도라도 줄이고 싶다. 적어도 지금 내 마음은 흐레는 없앨 수도 없고, 언젠가 그 물이 흔들리면 흐레가 다시 올라올 수밖에 없는 걸 안다. 그래도 공들여 수행으로써 흐레를 빠르게 가라앉히고, 청정한 마음을 되찾고 싶다. 그렇담, 청정한 마음을 이룩하고자 수행하는 곳 어디라도 절간이 되는 게 아닐까? (This is 도.량.청.정!)


일전에 스님께, 내가 싫어서 못견디겠는 사람이 있는데, 그 마음을 내려놓는 것마저 고통이라는 걸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좋아하는 것도 고백하는데, 싫어하는 걸 고백하는 건 왜 안돼요?"라는 스님의 답변이 놀라웠다. 수행자는 분별심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분별심을 내려놓는 과정이 너무도 아프고 힘들어 울고 짜고 글도 쌌는데. (이쯤되면 글을 쓴 게 아니다. 싼거다....)


짐작건데, 저 상황에서는 내 마음이 본연히 쫓는 걸 극도로 제한하는 게 중도에서 벗어나서 그리 말씀 해 주신 게 아닐까? 나중에 질문드릴 기회가 또 생긴다면, 언제는 내려놓으라 하고 언제는 마음을 쫓으라 답변하시는데 그 기준이 뭐냐고 여쭙고 싶다.


결국 우리는 끝에 다다라서 만날 거예요. 먼저 간 사람에 기다려주기!


꼭 굳이 불교교리적 접근이 아니더라도 이미 중용의 미가 아름답다는 걸 깨닫고 불자보다 더 능숙하게 중도를 실행중이신 비(非)불자분도 많으실 것이다. 사실 그 방법이 무엇이든 난 크게 개의치 않는다. 기독교든 유교든 도구가 중요하리. 자신만의 방편으로 적절한 평온에 이르는 게 중요하지.


난 이렇게 겨우 불법을 만나 어린아이처럼 아장아장 중도를 향한 연습중인데, 이미 울 남편은 종교인도 아니건만 나보다 더 능숙하게 중도를 지킬 줄 알아보인다. 실전에서 나오는 짬빠일까? 울남편 최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다.


이런 설명을 해 드려도 여전히 불가의 수행이 금욕주의적으로 보인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자. 달이 얼마나 이쁜데. 밤에 천문대 가서 달 한 번 봐 보시길 바란다. 지인짜 이쁘다.




내가 이래서 도반(함께 깨달음을 찾고자 하는 동료)를 찾으려 합니다

https://www.hihappyschoo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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