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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th Point Oct 24. 2015

중력 바라보기 _ 9화(최종화)

마성의 중력, 중력을 설명하는 신 설명체계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뉴턴


어린 시절의 궁금증 중에서 가장 풀리지 않았던 문제는 이것이었다. 내 주변의 모든 물체는 지지받는 대상이 없으면 땅으로 떨어지는데 유독 해와 달 그리고 별들만 떨어지지 않는 문제 말이다. 심지어 아주 아름다운 별똥별들도 지상으로 자신을 내던지는데 말이다. 어린 시절에 그 누구도 이 문제를 직관적으로 설명시켜 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놈의 중력'을 한번 적어보기로 한다.




마성의 중력, 중력을 설명하는 신 설명체계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뉴턴


때로는 눈앞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을 현명하게 ‘가려야만’ 진실과 진리가 드러나는 경우가 우리 삶 도처에도 있다. 온갖 정보와 말들이 넘쳐나고 현란한 모습으로 우리 눈을 흐리는 경우가 많다. 그것들을 지혜롭고 현명하게 ‘가리고’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태도로 볼 때 또 다른 진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명현의 별 헤는 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은 현재의 과학들을 깊숙이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뉴턴 역학의 세상 속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수정 보완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만유인력 법칙을 학교에서 그대로 배우고 있다. 왜 틀린 이론임에도 계속 배우는 것은 아래와 같다.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체계로써 만유인력은 그 효용성을 가지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통해 더욱 정확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그 오차는 너무나 미미하다. 달에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는 것 또한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으로 충분하다. 탐사선이 날아가는 고유 괘도와 각도 그리고 다양한 위치 관계를 계산해보면 오차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빛의 속도에 근접하는 빠른 속도나 태양의 몇 배 이상의 엄청난 중력이 존재해야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이 빛을 발하게 된다. 물론 현재 GPS 체계부터 시간과 길이를 맞추는 방식은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통해서 행해지고 있다.



중력은 지금까지 알려진 네 가지 기본적인 힘 중 가장 약한 힘. 손 안의 야구공은 아주 무거운 지구가 끌어당기는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 당연하게도 야구공을 사이에 두고 나와 지구는 한 명의 연인을 사이에 두고 싸우듯 서로 잡아당기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항상 내가 이기곤 한다. 나는 아주 무거운 지구의 힘을 이겨내고 하늘 높이 야구공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매일 중력을 부지불식간에 인지하지만, 재미 난 사실은 그 누구도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잡아당기는 중력을 느껴본 적이 없다. 신기하지 않은가?


더 신기한 사실은 바로 중력은 인력이라는 사실이다. 잡아당기기만 한다. 밀어내지 않는다는 말이다.(사실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중력은 인력이 아니라 척력이다.)  네 가지 힘 중에서 큰 물체를 지배하는 힘은 오롯이 중력뿐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수학과 과학이 세상을 설명하는 언어로 당당히 자리 잡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뉴턴의 만유인력 이전의 과학은 정성적이었다면 이후의 과학은 수식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하늘은 완벽한 존재이고 대지는 불완전하며 변화무쌍하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허물어 버렸다. 태양계의 천체들이 땅 위의 사과로 대표되는 모든 물질과 동일한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때부터였는지 모른다. 신이 과학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시기 말이다. 더 이상 신학에 얽매임 없이 과학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과학의 관점,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사회 혁명의 단초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하늘과 대지가 하나의 법칙으로  지배받는다는 이 세계관, 우주관, 가치관의 변화가 사회 혁명의 단초라 주장한다. 하늘에서도 더 이상 위와 아래의 구분이 없어지고 서로의 끌어당김만 있는데 왜 인간세상에서는 신분계층의 구분이 존재하냐는 이성적인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즉, 계몽주의의 출연이다. 18세기 후반, 유럽 전역에 걸쳐 일어난 구시대의 사상을 타파하려던 혁신적 사상운동이 그것이다. 1687년 뉴턴의 프린키피아라는 책에서 ‘모든 물체는 서로 잡아당긴다’라는 민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전 우주의 운동원리를 설명한다. 수학이라는 매우 완벽한 도구를 통해 설명한 이 법칙은 수학과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이룬 성과였다. 이러한 토대로 인해 ‘합리적 이성’이라는 현상은 가을 추수가 끝난 마른 들판에 불을 놓는 것처럼 퍼진 것이다. 수학의 뒷받침을 통한 이성적인 과학적 사고는 곧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 과학적 사고를 역사, 사회, 정치, 경제 모든 곳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과학의 영역에서 과학이 한 것처럼 사회도 이성의 힘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주입된 것이다. 계몽주의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생각이 슬며시  젖어들게 된다. 비약일 수도 있지만 이로 인해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과 영국에서의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최소한 단초를 제공한 것은 틀림이 없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치 아래 군주제와 신분제를 폐지시키고 공화정을 세운 프랑스. 1769년에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으로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 영국. 이상이 중력으로 바라본 과학의 변화와 그로 인해 변화된 세상이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 발견되지 못했다면, 과연 세상은 이러한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해서는 바뀐 것이 과학뿐이다. 우주를 좀 더 세밀하게 인지하고 살펴볼 수 있는 도구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변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뉴턴의 만유인력이야말로 사회의 변화를 가장 많이 이끌어 낸 과학 이론이 아니었을까?


패러다임에 의해 과학을 바라보는 세계관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이전의 패러다임이 작동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패러다임은 변화되었지만 이전의 패러다임이 그대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세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만큼 하나의 가치체계나 설명체계에 의존하는 삶은 쉽게 변화하지 못하며 그것을 기반에 두는 삶을 안정적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여전히 연필을 떨어뜨렸을 때와 해가 움직이는 원리가 동일하다는 사실이 직관적으로 믿어지지는 않는다. 이 사실이 과학과 함께한 나의 삶에 하나의 아이너리 일 것이다. 중력 바라보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죽을 때까지 중력을 바라볼 것이다. 그것이 나의 삶이고 내가 가야 할 길이다.





중력 바라보기 _ 1화 / 중력에 대한 물음. 건축물로 바라보다
중력 바라보기 _ 2화 / 에녹서에 나타난 우주관과 중력에 대한 인식
중력 바라보기 _ 3화 / 고대인들의 우주관과 중력에 대한 인식
중력 바라보기 _ 4화 / 그리스 시대, 변화된 중력에 대한 인식
중력 바라보기 _ 5화 / 중력 인식에 대한 균열, 떨어지는 게 아니라 끌어당기는 게 아닐까?
중력 바라보기 _ 6화 / 뉴턴의 선택, 빈 공간에서 서로 잡아당기는 힘
중력 바라보기 _ 7화 / 하나의 보편적인 법칙, 치명적인 아리따움 
중력 바라보기 _ 8화 / 뉴턴 이후의 중력 _  중력은 힘이 아니라 시공간의 휘어짐이다
중력 바라보기 _ 9화 / 마성의 중력, 중력을 설명하는 신 설명체계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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