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이 Dec 24. 2022

남편에게 반드시 사과받고 싶다면

나는 악착스럽게도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미안해"


그 한 마디면 될 것을 남편은 절대 사과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믿었던 배우자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통곡을 할 일인데, 정작 그 사람은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어쩌면 미안해 한 마디에 화가 풀렸을지도 모른다.

사랑해 한 마디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고마워 한 마디로 다 덮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편은 자신의 행동을 온갖 변명으로 정당화하고,

오히려 화를 내는 나를 정신병으로 만들어버렸다.




https://m.kyobobook.co.kr/digital/ebook/ebookContents.ink?barcode=480D211040150#




"네가 그렇게 느꼈다니 유감이야"


몇 날 며칠을 다투던 끝에 남편이 한 사과는 이랬다. 영어로는 똑같이 "아임 쏘리" 이지만 분명 의미는 다른.


"네가 그렇게 느꼈다니" 라는 전제 자체가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네가 문제를 삼아서 안타깝다는, 즉 그걸 문제삼은 네가 잘못이라는 수동공격적인 사과라고 느껴졌다.


이 사람은 정말 자기가 한 행동이 부적절하다는 걸 모르는 걸까?

선을 넘었다는 걸 모르는 걸까?

자신의 행동이 초래한 결과를 모르는 걸까?

자신이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political correctness 에 대해 그렇게 조심한다는 사람이 진짜 몰랐던 걸까?


그걸 모르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https://brunch.co.kr/@kim0064789/392




"미안해"


나는 남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긴 했다. 몇 달이 걸렸지만.


남편의 "특별한 친구"는 한국으로 귀국했고,

몇 년간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를 괴롭혔던 그녀의 부재로, 더 이상 새로운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이혼을 결정했다.

나의 미래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혼할 텐데, 이 사람이 뭘 하든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다.

어차피 이혼하면 남인데, 이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든 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내 남편이 아니었다.


내가 더 이상 아무 문제도 삼지 않으니, 남편이 사과했다.




https://brunch.co.kr/@kim0064789/507




"나도 잘못인 건 알았어"


내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남편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설명했을 때는, 남편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었다.


내가 얼마나 화났는지 분노를 표출하거나,

온갖 비꼬기로 빈정대고 돌려 까거나,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수사하며 들들 볶아도,

꿈쩍 않던 사람이었는데.


그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나 보다.


내가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쏟아부을 때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의 양심에 귀 기울일 기회가 없었나 보다.


상대에게 필요한 시간을 주는 것.

그게 내가 남편에게 사과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시간은 며칠이 걸릴 수도, 몇 달, 또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 시간을 기다려 줄지, 그 안에 다른 결정을 할지는

오로지 나에게 달렸다.




https://brunch.co.kr/@kim0064789/508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다르게 했을 거야"


남편이 나에게 사과하면서 했던 말.


나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상대에게 시간을 준다는 건

겉으로는 화해한 척하며, 속으로는 이혼 준비를 하는 게 아니다.

겉으로는 괜찮다고 하며, 속으로는 바라는 게 따로 있는 상태가 아니다.

겉으로는 화 안 났다고 말하며 속으로는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보거나,

팔짱을 끼고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거나,

한숨을 쉬고 눈알을 돌리는 등 몸짓으로 표현하는 상황이 아니다.




내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내가 상대에게도 솔직하게 표현하며 진심을 다하고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고

내가 바라는 나의 인생을 실천해 나가야지,


남편을 벌주고 싶어 하고

남편도 괴로워하길 바라고

남편과 그녀의 "특별한 우정" "영원한 우정"에 영향력을 행사해 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https://brunch.co.kr/@kim0064789/515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정직했으면 좋겠어"


남편의 단점만을 콕콕 집어 얼마나 나쁜지 비난하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남편의 이상적인 모습을 소망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

"어떻게 인간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런 끔찍한 말을 해!"

"네가 하는 그 행동들이 바람이고 외도고 불륜이라고!!!"


아무리 외쳐봤자

"나는 그런 거 아니야"

한 마디에 끝날 일이다.



그리고, 내가 남편이 나에게 숨김없이 솔직하게 모든 걸 말해주길 바란다면

남편이 할 말을 전부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남편이 어떤 일에 관해 이야기해 줄 때마다,

외도라고

바람이라고

불륜이라고

대체 왜 그랬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고

화를 낸다면...


남편은 결국 입을 닫아버리고 말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건 남편이 그런 행동을 안 했기를 바라는 것이지만...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을 남편도 바꾸지는 못하니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소원을 빌 때 아주 신중해야 한다...




https://brunch.co.kr/@kim0064789/361




"나는 괜찮아질 거야"


3년 가까이나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가끔은 화가 난다.

아직도 여전히 눈물이 차오른다.


억울하고 화가 나서.




내가 소리소리를 질러야 화가 풀리겠다면, 건강하게 소리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노래방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하거나, 콘서트 장에 가거나, 놀이기구를 타거나...


내가 펑펑 울어야만 화가 풀리겠다면, 건강하게 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과의 대화, 슬프지만 아름다운 영화 한 편, 심금을 울리는 노래 한 곡...


내가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줄 곳을 찾아야 한다.

심리상담, 서포트 그룹, 아니면 일기장이라도...




이제는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 내가 먼저 꺼내지는 않는다.

남편은 가끔 자신이 얼마나 피해자였는지를 강조하며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내가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결말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결말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말해봤자 과거를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깨진 도자기처럼 금이 간 상태로 붙어있다.



https://brunch.co.kr/@kim0064789/411 ​

https://brunch.co.kr/@kim0064789/387




"괜찮아"


나는 그 사건을 통해 많이 성장했다.

나는 많이 변화했다.


지금 불행한가? 라고 물으면 불행하지는 않다.

행복한가? 라고 물으면 행복할 때도 있다.

이혼할 것인가? 라고 물으면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완전히 괜찮아질 수 있을까?

남편이 한 진심 어린 사과를 나도 진심으로 받아줄 수 있을까?

나는 괜찮을 수 있을까?


대체 언제까지 그럴래? 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세상은 잘 돌아간다.


우리가 결혼을 유지해도 세상은 잘 돌아갈 것이고

우리가 이혼해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갈 것이다.

나는 괜찮아지고 싶다.




https://brunch.co.kr/@kim0064789/36




https://class101.net/plus/ko/products/DCNO3sPxKUBstRcB0ui9


매거진의 이전글 남편과 여사친 사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