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정이 끝나간다. 하루하루 기록하는데도 아쉽다.
<스페인 2일차>몬세라트, 치유의 성모님부터 바르사까지
<스페인 3일차> 가우디는 외계인일거야 &보케리아 시장
<스페인 7일차>코르도바,이슬람과 가톨릭의 기묘한 동거
<스페인 8일차> 말라가, 지중해와 태양을 피카소 마냥
<스페인 9일차>마침내 세비야, 화려한 과거를 마주하다
1929년생이면 이 동네에서 신생아 급이란다. 세비야 스페인광장 얘기다. 1929년 이베로(이베리아)-아메리카 엑스포를 위해 만든 광장, 아니 건축은 그 자체가 스페인 홍보관이다. 한때는 제국과 식민지였으나 같은 언어를 쓰면 어떤 느낌일까? 그들을 초대하고 세비야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마이리얼트립 통해 신청한 세비야 투어는 오전 8시 반 스페인광장에서 시작했다. 인당 7.5만원 투어가 부담되서 조금 저렴한 걸로 결정했는데 어찌저찌 대성당 내부 투어까지 얻어걸렸다. 김호영 가이드님의 이 투어는 결론적으로 최고. 5시간 가까이 진행된 설명에 홀딱 빠졌다. 이렇게 세계사를 배웠으면 나도 친구 V나 H처럼 서양사를 전공했을지도 모르겠다. 사건은 점으로 연결되고, 강대국의 식민지 수탈사는 누군가에겐 부귀영화를, 누군가에겐 지옥을 안겼다. 승자의 역사, 시민의 역사 모두 다르고, 알면 알수록 재미있잖아!
색이 달라진다는 가이드 쌤 조언에 따라 남편은 오후 4시 스페인광장을 다시 방문했다. 난 뻗어서 쉬었다. 다르긴 다르다.
가이드 쌤 덕분에 스페인 국기도 다시 본다. 절대 따라 그릴 수 없는 복잡한 국기로만 알았는데, 스페인 역사이자 현재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카스티야, 레온, 나바라, 아라곤의 문양. 카스티야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이 결혼동맹 후 각각 왕으로 자기 지역을 통치한건 이번에 알게 됐으나 다른 지역은 잘 몰랐다. 나바라가 2000년대 초까지 바스크 무장독립 운동으로 시끄러웠던 동네고, 아라곤은 카탈루냐가 2017년까지 독립을 격렬히 시도했으니 스페인이란 나라도 간단치않다. 이 네가지 문양이 스페인광장 곳곳을 나누어 장식하고 있다. 마치 삼국시대 같은 과거가 아니다. 우리는 너 신라 출신이냐? 난 백제 말 쓴다고 하지 않지만 그들은 그렇다. 훨씬 찐한 고유 정체성을 갖고 있다.
스페인광장 아치 밑에는 각 도시 별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타일 벽화가 있다. ABC 순서대로 가는데, 그라나다가 눈에 띈다. 여행 며칠 했다고 친근해진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무어인들을 완전히 내몰아내는 1492년 풍경이다. 보합딜 왕이 알함브라 궁전 열쇠를 내밀고 항복하는 장면, 700여년 이슬람 식민지에서 벗어난 스페인 통일의 기록이다. 저 부부가 얼마나 대단한 영웅인지 알겠다.
와중에 라만차 평원 동네의 그림은 돈키호테와 산초. 바르셀로나 그림은 또 이사벨 여왕이다. 그녀가 온동네에서 사기꾼 취급을 받던 콜럼버스와 손잡고 첫 항해 보고를 받는 역사적 장면.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항로를 장악하면서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던 이사벨 여왕의 한 수가 스페인을 당대 초강대국으로 만들줄이야.
로마 시대에도 잘 나갔고, 이슬람 통치 기간에도 잘 나갔고, 세비야의 세번째 전성기는 대항해시대였다. 어렵게 탐험에 성공해 뱃길을 개척해도 남들도 다니면 그만인지라, 콜럼버스는 당시 교황에게 교통정리를 청했다. 결국 세관을 둔 독점 항구 세비야는 120년 동안 그 지위를 누렸다. 심지어 세비야는 내륙이다. 과달키비르 강을 통해 항구의 부귀영화를 누리다니.
스페인광장을 빠져나오면 세비야 대학이 보인다. 어제는 그냥 지나쳤는데, 오늘 가이드 쌤 설명을 듣고보니 이게 신대륙에서 가져온 담배를 생산하던 공장이다. 처마 아래 Fabrica Real de Tabacos 란 간판. 스페인에서 real은 royal. 즉 왕실담배공장이다. 역시 당대의 독점산업. 그 담배공장에서 일하던 집시 여공 카르멘이라고 들어는 보셨는가? 비제의 카르멘 선율을 듣는데 짜릿했다. 오른쪽 대학 내부 사진은 오후에 혼자 다녀온 남편 작품.
콜럼버스가 '인도'라며 신대륙을 찾은건 1492년 일이지만 스페인에는 마젤란도 있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콜럼버스나 포르투갈 출신의 마젤란은 당대 해양대국 포르투갈의 관심 밖이었다. 스페인은 몽상가 취급을 받던 그들을 품었다. 이런게 지도자의 역할인건가.
1519년 5척의 배를 이끌고 떠난 마젤란은 아메리카 대륙의 끝단에 마젤란 해협을 지도에 남기고 아시아까지 갔다. 그는 필리핀에서 죽었지만 탐험대 278명 중 18명은 3년 만에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인류 역사상 첫 세계일주다. 그들은 괌과 사이판, 필리핀을 스페인에게 식민지로 선물했다. 후추, 계피, 육두구, 정향 등 향신료가 같은 무게 황금 만큼 비쌌던 시절에 원산지 상품과 유통을 확보했다.
마젤란 탐험대가 떠나고 돌아온 곳이 세비야 황금의 탑이다. 복귀 500주년이던 2022년 돌아온 빅토리아 호를 똑같은 크기로 복원했단다. 생각보다 작다. 바람을 이용하는 돛단배라 노젓는 노예들로 혹사시켰던 갤리선보다야 한결 낫지만 갑판 위에서 먹고 자야했던 선원들의 삶은 마찬가지로 고단했을듯. 부귀영화는 여왕과 왕이 가져갔지만.
식민지를 수탈해 잘 나가던 세비야. 그 대성당은 역사의 텍스트 같다. 일단 나오는 문을 보면 이슬람 건축 양식 양옆으로 베드로와 바울의 조각이 있다. 히랄다 탑 역시 중반 위까진 이슬람 스타일. 위엔 가톨릭 스타일을 얹었다. 이런 혼종이었구나.
높이 24m, 폭 18m의 황금제단. 1.8톤의 황금을 그야말로 바른 제단이다. 세비야, 대단했다. 하나하나 성경의 이야기를 담은 건 자세히 볼 수 없고, 상단에 피에타조차 황금이라니 한없이 슬픈 모습조차 좀 다르게 다가온다.
아래 왼쪽 사진은 은의 제단이다. 당시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매년 270톤의 은을 수탈했다. 단단한 신대륙 나무 마호가니로 조각한 파이프오르간. 파이프만 7000개가 쓰였다나. 이게 다 누군가의 피눈물이라..
콜럼버스의 관이다. 그는 유언에 따라 도미니카 공화국에 묻혔다가, 쿠바에 묻혔다가..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스페인이 괌, 사이판, 필리핀, 도미니카 등을 몽땅 뺏기면서 안식 대신 이장을 해야했다. 그의 관을 들고 있는 것은 스페인왕국의 왕들이다. 노다지 같은 식민지를 찾고, 스페인을 부강하게 만든 위인 다운 묘다. 콜럼버스의 서사에서 빠져있는 아메리카 대륙 사람들의 비극을 외면하긴 힘들다.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아아아, 강대국의 식민지 다툼에 등 터져 나간 대륙들.
무리요의 그림이다. 왼쪽 '성 안토니오의 상상'에서 안토니오만 도려내 훔쳐갔던 이야기가 놀랍고, 스페인의 수호 성인 산타 후스타와 산타 루피나 자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했다.
히랄다 탑에 오르면 세비야 전경이 보인다. 내려다보이는 대성당, 알카사르, 그 오른쪽 문서보관소 건물이 세계문화유산이다. 우리 숙소는 문서보관소 옆이다.
오늘의 사건은 사실 내가 예약한 플라멩코 공연 표를 잃어버린 것. 바우처는 커녕 이메일도 어찌된 건지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하얘져서 받은편지함을 뒤졌으나 실패. 내 머리를 믿지 못해 예약하는 대로 노션 페이지에 입력해두었는게 그것만 빠졌다. 뭔가 딴 짓에 정신 팔렸던게지. 남편은 괜찮다고 했다. 둘이 합쳐 72유로나 하는 걸 예매했는데, 혹시 날려도 상관없으니 신경쓰지 말라더라. 나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속은 어지럽고.. 다행히 공연장을 찾아갔더니 구매자 이름이 있었다. 나는 분명 서울에서 온라인으로 예매했는데, 수첩에 펜글씨로 구매자 명단을 적어놓은 공연장의 사정이 잠시 신기했고.. 어쨌거나 설혹 사고쳐도 마눌 탓 대신 내편 해주겠다는 그의 태도를 칭찬한다. 뭐 사진도 열심히 찍어주고, 잘하고 있다.
공연은 좋았다. 당연하지. 처음엔 색기가 흐르는 젊은 청년에 눈길을 빼앗겼고, 입모양을 이리저리 찌그러트리며 노래하는 아재의 포쓰에 압도당했으나, 끝내 우리를 숨막히게 한 건 저 언니다. 현란한 몸짓과 절도 있는 동작은 기본이고 표정과 손끝 연기 하나하나 예술이다. 나보다 더 통통하신데 올록볼록 몸이 예쁘기만 했다. 기타 연주자들도 끝내줬다. 거리의 악사마다 이 동네는 기타 잘치는 이가 왤케 많냐고 했는데, 차원이 달랐다. 와중에 남편은 플라멩코 기타 연주 앨범도 갖고 있다고 자랑했다.
가이드쌤이 야경 보라고 추천해준 메트로폴 파라솔. 평범한 전망대가 아니었다.
이런 야경을 얻고,
이런 야경을 본 것보다.. 야경을 함께 즐긴 시간이 더 좋았다.
드디어 #마냐먹방. 아침은 전날 장본 걸로 숙소에서 간단히. 빵에는 꼭 잼이 필요하다는 그의 취향을 존중했고, 문어 통조림 사봤는데 괜찮다. 점심은 타파스 대회에서 상 받았다는 타파스 메뉴가 있던 Restaurante El Pasaje Tapas. 공연장 문의하러 가던 동선에서 골랐다. 차가운 토마토 스프 살모레호는 집집마다 다르지만 점점 중독되는 맛. 연어 타르타르도, 상받았다는 또띠아 메뉴도 훌륭했다.
저녁은 메트로폴 파라솔 부근에서 골랐다. 최고 평점 집은 줄이 있길래 그 옆집 RESTAURANTE DOÑA ENCARNA. 세비야 샐러드는 감자와 새우에 마요네즈 조합이 매우 훌륭했고, 갑오징어 튀김이 오늘의 픽. 신선한 해물을 바로 튀겨내면 그게 천국의 맛이지. 드디어 크로켓도 맛봤는데 남편이 하나 먹고 나머지 내게 양보. 내 취향이군.
세비야의 밤, 스페인의 마지막 밤이다. 10시 넘도록 거리는 흥겹다. 얼마전 세비야 부활절 축제나 다음주 봄꽃 축제에 비하면 지금 매우 덜 붐빌 때라는데 좋다. 전선 없는 친환경 전차와 자전거가 함께 다니는 길도 좋다. 뭐든 안 좋겠냐고.
무튼 오늘의 포스팅은 해박한 지식으로 세비야를 보야주신 김호영 가이드님에게 헌정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데.. 감사!
가이드님 유튭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