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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Jun 19. 2017

3.4.2. 편견과 나

3.4. 주위 사람들

소속이 없는 상태에서 일을 쉬거나 다음 진로를 모색하는 사람에 대해 ‘노는 사람’, ‘할 일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하여 동등한 대화 상대나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잠시 일에서 떠나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경우에도 진로 면에서 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해 본인 스스로 ‘놀고 있다’는 인식을 갖는 경우가 많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 애매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안정된 삶을 살다 또다시 만난 과도기의 시간은 위기가 아니라 보다 일찍 주어진 기회가 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자신을 긍정하고 변화를 감행해야 한다.


그림자는 나무가 아니다. © 남효진

나에 대한 편견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로를 고민하는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을 둘러싼 편견이 있다. ‘남편 따라와서 놀고 있으니 얼마나 편하겠어’라는 사람들의 생각. 직장을 휴직한 상태에서 단기로 미국에 머무르는 사람들이라면 동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의 진로를 다시 계획해야 하는 경우, 이런 편견과 내부적인 갈등의 이중고로 괴롭다.


소속이 사라지고 직업이 사라지면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 보인다. 지금의 ‘나’는 미국 오기 전과 다를 바 없는 ‘나’인데, 이런 나를 ‘노는 사람’ 또는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보는 사람들이 생긴다. 사람들과의 모임에 참석하면, 예전처럼 동등한 대화 상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만나게 된다. 소속과 직업이 없고 거기에 가정주부이기 까지 하면, 사람들은 더 이상 ‘나’에게 관심을 갖고 먼저 질문하지 않는다. 늘 중요한 사람이었던 내가 갑자기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그림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상황을 반복해서 겪다 보면 불편한 자리는 피하게 되고, 폭넓던 인간관계는 점차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로 좁아진다.


지현 씨는 학교를 준비하며 ‘미국 유학생 와이프’로 사는 동안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다고 했다. “남편 학교에 행사가 있었어요. 저도 와이프니까 갔는데, 저만 와이프였어요. 남편 학과의 작은 행사였는데 남편의 선배분이 뒤풀이를 하자고 하더라고요. 저녁을 먹는 걸 얘기하면서 어떻게 얘기했냐면, '제수씨는 할 일 없죠? 제수씨는 당연히 되죠. 할 거 없잖아요.' 그게 되게 충격이었어요. 그동안 주체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집에 있어도 내 루틴이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게 너무 기분이 나쁜 거예요. 그때 그 얘기를 듣고 ‘아, 내가 여기 있으니까 노는 사람이 되는 건가.’ 여기서 보면 와이프들이 아기도 낳고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아기 낳고 키우다 보면 어느 순간 무시당할 수도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기 낳고 키우는 것도 되게 중요한 일인데, 공부가 뭐 대수라고. 아기 안 키우고 집에만 있어도 할 게 되게 많은데. 그래서 진짜 빨리 영어 공부해서 점수 따고 학교 합격하는 걸 보여줘야겠다 다짐했어요. 그때가 아직도 기억나요.”


나의 애매함


직업이 없고 소속이 없는 ‘나 자신’을 스스로 애매하게 느끼는 경우도 많다. 일을 쉬는 기간의 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가 애매하다. 사회학자 엄기호 선생은 <공부중독>에서 소속감이 없어지는 것이 불안해 대학 졸업을 유예하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태어나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소속이 안 되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러다 처음으로 소속이 사라지는 거죠. 당연히 불안하죠. 다른 말로 하면 제도적으로 무중력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제도에 속하지 않으니 자기가 뭘 하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도 안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안 해도 뭔가를 하는 것 같거든요. 학교에 있으면 공부를 안 해도 공부를 하는 중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제도 밖에서는 뭘 해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 같은 거죠. ‘중력감’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공중에 붕 뜨는 거죠.” 미국에 오기 위해 직장을 떠난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 역시 그전까지 대부분 직장에 속해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직장을 떠난 자신이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된 것 같고 그래서 노는 것 같다. 바쁘게 살고 고민은 멈춰지지 않고 잘 노는 것도 아닌데 ‘노는 시간’, 그런 시간이 흘러간다.


이렇다 보니, 쉬고 있고 새로운 진로를 준비하는 동안,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가 애매해진다. 과거의 나를 기준으로 ‘디자이너’였다고 얘기해야 하나, 현재를 기준으로 ‘주부’라고 해야 하나, 미래를 기준으로 ‘진학이나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직업이 없는 사람’, ‘노는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을 알기에 나를 어떻게 표현하고 소개할지가 고민이 된다. 자신에 대한 표현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기에 자신이 현재 하는 일과 살고 있는 삶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새로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작아진다. 여전히 당당하고 멋있고 싶은 내가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긍정이 필요한 시간


나탈리 크납 Natalie Knapp은 그녀의 책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에서 불확실한 시간인 과도기를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시적인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그녀는 말한다. “과도기는 쉽지 않은 시기다. 변화의 시기, 익숙한 삶에서 잘 알지 못하는 삶으로 문턱을 넘어야 할 때, 우리는 긴장하고 불안해한다. 무슨 일을 겪게 될지, 이때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 과도기는 새로움을 동반하는 창조적인 시기다. ... 과도기는 인생 중에 만나는 ‘시적인 지대’다. 과도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질은 무척이나 달라진다. 과도기에는 삶이 그동안 몰랐던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고, 잠재력이 발휘될 수 있으며, 이런 잠재력이 뒤이어 오는 안정기에 계발되고 다져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안정된 삶을 살다 또다시 만난 과도기의 시간은 위기이기도 하지만, 남보다 일찍 주어진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 시간을 실패가 아닌 가능성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믿어야 하고 또 한 번 변화해야 한다.


한때, 여행을 가서 유람선을 타는 일을 우습게 생각했다. 내가 직접 계획하고 내 두발로 걷는 여행이 아니라, 남이 운전하는 배 안에 앉아 보여주는 대로 즐기는, 소극적인 사람들의 관광이라 무시했다. 그러다 몇 년 전, 학회 참석을 위해 갔던 프랑스 도시에서의 마지막 날 선배와 친구와 함께 탔던 유람선은 나의 속 좁은 편견을 깨 주었다. 유람선에는 유람선에서만 볼 수 있는 또 다른 풍경이 있었고, 유람선에서 보이는 세상을 고르고 잘라보는 일은 여전히 내 몫이었으며, 유람선에서 보이는 땅 위의 관광객은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멋진 물 위의 풍경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이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배를 타고 내린 후 내게는 아름다운 도시를 배경으로 선배·친구와 어깨를 맞대고 활짝 웃던 사진이 주어졌고, 우리는 내린 곳에서 또 다른 여행을 시작했다.  

배 타는 즐거움은 타본 사람만이 안다. © 남효진

직접 타 본 ‘미국 유학생 와이프’라는 배 역시, 그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경험과 소득이 있다. 이 배에 타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풍경을 보고, 이 배가 아니라면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이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미국 유학생 와이프’라는 이름을 단 이 시간은, 나를 향한 편견도 있고 나 스스로도 애매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나를 긍정하고 나를 지켜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불확실한 시간이지만 방황과 모험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꿋꿋이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또 한 번 새로워지고 깊어지고 분명해질 거라 믿는다.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목차 및 이전 글 보기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소개
1. 배경

    1.1. 우리 안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

    1.2. 기대와 다른 현실

    1.3. 이상한 나라를 만드는 요인들
2. 다양한 경로와 이슈들

    2.1. 새로운 진로를 찾는 거대한 고민

    2.2. 현재 직장과 새로운 가능성 사이에서 고민과 저울질

    2.3. 나의 일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격동기

    2.4. 정해진 계획 안에서 살며 여유를 즐기는 시간

    2.5. 육아에 집중하며 향후 진로의 방향성 고민
3. 11명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에게서 찾은 인사이트

    3.1. 준비와 실행

        3.1.1.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결심

        3.1.2. 좋은 하루를 위한 노력

    3.2. 진로

        3.2.1. 진로 재설정        

        3.2.2. 진로에 대한 불안

        3.2.3. 해외에서의 신분, 면허, 언어의 제한

        3.2.4. 비우고 채우는 시간

    3.3. 가족

        3.3.1. 부부, 동반자 혹은 희생자

        3.3.2. 가족, 후원자 또는 상사

    3.4. 주위 사람들

        3.4.1. 친구, 선배, 선무당

        3.4.2. 편견과 나
4.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지침


월요일, 목요일마다 업로드 예정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인터뷰 참가자들의 이름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대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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