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
*Enbing:
end+being의 합성어(동사).
끝과 시작, 혹은 시작과 끝. 지속되는 흐름.
α(알파)와 Ω(오메가)이며 ॐ(옴)
<작가 주>
들어가며
Happy Enbing은 앞선 열 개의 단편들의 ending만을 모아놓은 챕터입니다.
그동안의 이야기는 Happy Ending으로 끝이 나며 동시에 Being이 됩니다. Enbing이 됩니다.
끝은 언제나 맞닿아 있으니까요. 어느 곳으로든.
이번 챕터는 앞선 이야기와 함께 읽어보실 것을 권하며, 기존의 이야기들도 다시 한번 수정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목차
Happy Enbing 1 (첫 번째 이야기 ~ 다섯 번째 이야기)
Happy Enbing 2 (여섯 번째 이야기 ~ 열 번째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 볼펜
https://brunch.co.kr/@param0112/333
으으음..... 내가 깜빡 잠이 들었나 보네.
어? 당신 뭐 해? 그렇게 서서? 볼펜은 왜 들고 있어?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이것들 치운다는 게 그만...
티비도 그대로 켜 놓았네. 나원 참... 미안미안.
준이는? 재웠어? 녀석, 언제 잠들었대.
깨우지 그랬어. 내가 재울랬는데.
고생했어. 고마워. 당신도 오늘 하루 종일 힘들었지?
여기 앉아서 좀 쉬고 있어. 내가 다 치워놓을 테니깐.
엇! 빨래도 그대로구나. 괜찮아 괜찮아. 내가 개어놓을게.
그런데 당신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아! 일기 쓰고 있었구나. 그래 맞다!!
내가 볼펜 하나 사 왔는데. 집에 오는 길에 우연히 서점 앞에서 봤는데 당신이 딱 좋아할 것 같더라고.
어디 뒀더라? 생각났다! 잠시만 있어봐.
자. 여깄어. 어때? 맘에 들어? 당신 이 색깔 좋아하잖아. 볼펜심도 당신이 좋아하는 두께더라고.
내가 한 번 시험 삼아 써봤는데 슥슥 잘 써지더라.
자자. 그럼 사모님은 쉬고 계세요. 준이 장난감이랑 어질러진 것들은 내가 싹 다 정리할 테니.
그래! 일기 쓰고 있었지? 그럼 새 볼펜으로 써 봐. 필기감이 진짜 좋아. 정말이라니깐.
자 그럼 이제 한 번 정리를 시작해 볼까? 아이고 창문도 열어야겠다. 갑갑하네.
딸칵.
나는 드러난 볼펜심을 거두고 새 볼펜을 들어 노트 앞에 앉는다.
남편의 말처럼 새로운 볼펜의 필기감이 좋다.
매서운 바람이 거실로 들어왔지만 새로운 공기가 가득 찬 거실은 다시 평온하다.
나는 글을 써 내려간다.
두 번째 이야기: 미소
https://brunch.co.kr/@param0112/334
갑자기 한기가 돌았다.
뒷목에서 시작한 한기는 척추를 따라 허리로 내려가며 온몸을 오싹케 했다. 순간 아랫배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혹시? 생리인가?
아닌데? 며칠 전에 끝났는데? 아니겠지.
머리는 아니라고 했지만 통증의 느낌은 정확히 그것이다. 나는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K팀장에게 양해를 구하곤 화장실로 향했다. 그의 얼굴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미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어딘지 불만스러운 표정이 차지했다. 왜?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흐르는 느낌이 든다.
확인해 보니 역시 생리였다.
하필 오늘!! 이렇게 빨리?!
첫 생리 이후 주기가 어긋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했다. 그래도 가방 속에 생리대가 있는 건 다행이다. 손을 씻은 뒤 거울을 보는데 조금 전 일이 떠올랐다.
나를 보며 짓던 미소와 똑같은 그의 미소. 그리고 갑자기 변한 표정.
아니, 아닐 거야.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계속되는 통증을 참으며 돌아간 자리엔 K팀장은 없었다. 직원은 그가 급한 일이 생겨 먼저 갔다고 하였다. 그리곤 메모를 전해주었다.
'회사에서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먼저 일어납니다. 미안합니다. 천천히 맛있게 드시고 일어나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더 주문하시고요. 계산은 걱정 말고 편하게 있다 가세요.'
급한 일? 무슨... 일일까?
뭐... 워낙 뛰어난 분이니 그럴 수 있지...
입맛이 뚝 떨어졌다. 천상의 음식 같았던 요리도 왠지 악취가 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레스토랑 전체에 묘하게 역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생리가 왜 다시 시작됐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세 번째 이야기: 표정
https://brunch.co.kr/@param0112/335
집으로 돌아온 B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후 차가운 맥주 한 캔을 꺼내 한 번에 들이켰다. 마음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는 두 번째 맥주캔을 따곤 소파에 앉아 비상계단에서 보았던 것을 떠올려 보았다. 소름이 다시 올라왔다. 그래도 불안감은 훨씬 누그러졌다.
분명 잘못 본 것일 거다. 밤까지 새웠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생각하니 점점 그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어느새 소름도 사라졌다. 그래도 무언가 찝찝했다.
차가운 캔을 들고 한참을 생각하던 B는 최주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나야 최주임. 집엔 잘 들어갔어?
그래? 응응. 난 잘 들어왔지. 다른 게 아니고 너 그냥 스케줄대로 내일 쉬라고 연락했어.
아 그거? 걱정 마. 내가 박대리에게 지시해 놓을 테니.
아냐 아냐. 너도 고생했는데 좀 쉬어야지. 괜찮아. 그냥 쉬어. 그래그래.
하여튼 네가 이번에 정말 고생 많았어. 고맙다.
그래. 휴가 갔다 와서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래.
알았어. 그럼 출근해서 보자. 쉬어.
고생했어 최주임. 들어가.
전화를 끊은 B는 한결 가벼워진 마응로 손에 든 맥주를 마셨다. 피곤이 몰려왔다. 그는 남은 맥주를 마저 들이켠 후 소파에 드러누웠다. 바닥에 머리가 닿자 곧바로 정신이 아득해지며 저절로 눈이 감겨왔다.
'나는 벌레가 아니야...'
깊은 잠으로 빠져들어가던 B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을 기억하진 못했다. 그리곤 알 수 없는 꿈들을 꾸었다.
네 번째 이야기: 수다
https://brunch.co.kr/@param0112/338
'숨'은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바람이 지나갔고 소리가 지나갔다.
풍경들과 사람들도 지나갔다. 감은 눈 속에서, 몸속에서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갔다.
멈출 수 없었다.
그랬다. 그렇지만, 희미한 것이, 조그만 것이, 연약한 것이 '숨'을 붙잡고 있었다. 눈을 감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
그것은 허리를 감싸는 소녀의 투명한 손길이었고 목 뒤에 전해지는 어렴풋한 입김이었다.
"'숨'아...."
'숨'의 등을 '결'이 가만히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나의 친구야. 내 전부야."
바람과 소리가, 풍경과 사람이 멎었다.
"내가 여기 있어줄게."
오월의 햇살이 '숨'을 따뜻이 비췄다.
"바람이 지나지 못하게, 따뜻함이 너에게 머물게 내가 안아줄게."
'숨'은 천천히 눈을 떴다. 파란 하늘이 눈 속에 담겼다. 그리고 초록의 너울대는 물결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들은 지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숨의 몸 깊숙이에 머물렀다.
오월의 햇살 아래 풍경은 조금씩 짙어져 갔다. 작은 숨결과 함께.
다섯 번째 이야기: 에록(Aerok)
https://brunch.co.kr/@param0112/339
L. 주니어는 퉁퉁 부은 눈으로 여러 명의 아이와 함께 낯선 곳에 도착했다.
한참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곳에 있는 건 아이들과 휴머노이드뿐이었다. 몇 개월간은 무척이나 바빴다. 복제를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도 행해졌다. 지루하고 복잡한 모든 검사가 끝날 무렵엔 그도 다른 아이들도 그날의 충격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생각처럼 그곳이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식사와 잠자리도 깨끗했고 정기적인 교육과 검사도 받았다. 압박은 없었다. 다만 이곳에선 휴머노이드가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관리를 위해 존재했다. 대부분의 일은 아이들 스스로가 해야 했다.
1년쯤 지나자 모든 아이들이 이곳의 생활에 적응했다. 그들은 아침이면 일어나 잠자리를 정리하고 간단한 운동을 한 뒤 정해진 순번에 따라 식사를 준비했다. 청소나 빨래도 마찬가지였다. 일과가 끝난 저녁에는 각자의 취미에 따라 여가 활동을 했고 여러 가지를 배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정해진 시간에 잠이 들었다. 질서만 지킨다면 누구도 아이들을 압박하지 않았다.
L.주니어와 아이들은 이곳의 생활에 만족해했다. 부모님이 그리울 때도 있었지만 질서 속에서 몸을 움직이고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일상에서 마음을 달랬다. 무엇보다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에 대한 다음 계획이 어떤지는 모른다. 시련이 닥칠 수도 있고 또 다른 절망에 내몰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앞으로도 그럴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랬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프로젝트 SWAP"
1. 자신의 아이를 반납한다.
2. 반납된 아이를 휴머노이드 아이로 교환받는다.
3. 휴머노이드 아이는 기존의 아이와 완전히 동일하게 제작된다.
4. 프로젝트 참가자는 시민권 1회 갱신을 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