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가장 부끄러웠던 과거를 고백하며 첫 책의 첫 문장을 시작했던 이유
1994년, 노무현은 《여보, 나 좀 도와줘》를 출간한다. ‘노무현 고백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의 표지에는 서류 가방에서 쏟아진 잡동사니들과 바닥에 주저앉아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모습이 1990년대풍의 유머러스한 캐리커처로 그려져 있다.
책 제목그대로 누가 와서 좀 도와주기만을 바라는 모습이다. 보통 책들보다 작은 손바닥만 한 판형에 240쪽 분량의 그리 길지 않은 이 에세이집이 그의 첫 책이다.
노무현은 왜 이 책을 쓴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싶지 않다’는 절실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청문회 스타’로만 알고 있지 이런 점은 잘 기억해주지 않는다. 사실 요즘은 그것만이라도 좋으니 기억만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지만…….”
문장을 끝맺으면서 쓴 말줄임표에서 그의 간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정치인에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난다는 것만큼 큰 고통도 없다. 불과 8년 뒤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는 유력 정치인이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하면 납득이 잘 안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이 책을 펴낸 1994년은 그가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방송으로 생중계된 5공 청산 청문회에서 군부 독재의 주역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퍼붓는 모습이 그를 ‘청문회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4년 뒤 치러진 선거에서 패배했다. 1994년 그는 돈에 쪼들리면서 부산에 있는 지구당 사무실을 겨우겨우 유지해가는 처지였다. 1년 넘게 당 최고 위원이 내야 하는 당비도 내지 못했을 정도다.
사실 그가 첫 책을 쓰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돈’이었다.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다. 청문회 직후에는 권하는 사람이 많았다. 처음에는 우쭐하기도 하고 자랑도 하고 싶었다. 그다음에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서는 책을 팔면 돈을 좀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에 솔깃하며 이 글을 쓴다. 그래도 쓰는 김에 하고 싶은 말을 좀 하고 싶은데 그런 딱딱한 이야기는 독자들이 읽어주지 않는단다. 출판사의 주문이 까다롭다. 이건 빼라, 이런 이야기를 넣어라. 어쨌든 팔리기나 좀 팔렸으면…….”
만약 이때 그가 정치인 노무현으로서 살기를 포기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다시 변호사로 일했다면 별 어려움 없이 풍족한 삶을 누리며 살았을 게 분명하다. 한때 청문회장을 주름잡았다는 무용담을 간직한 채 말이다.
그렇게 살다가 몇 년 뒤 다시 국회의원 선거에 나와 당선됐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통령 노무현은 존재하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계속해서 정치인으로 사는 길을 택한 그는 이 무렵부터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글을 씀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만들다
정치에서, 최소한 현실 정치에서 승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세勢’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을 지지해줄 자신만의 세력, 든든한 지지층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잠깐, 여기서 먼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나는 그의 지지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무현이라고 하면 무조건 비난하는 사람도 아니다.
사실 열성 지지자가 되기에도, 극렬한 반대자가 되기에도 나는 너무 젊거나 또는 어리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던 해에 고등학교 1학년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이 글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한 정치인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건 어떤 종류든 그에 대한 개인적 감정 때문은 아니다.
최근 수십 년간 한국에서 노무현만큼 글을 통해 성공적으로 브랜드를 쌓아나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냈던 인물을 찾기 쉽지 않았다.
국회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는 다른 대부분의 국회의원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은 뒤에도 돈을 벌기 위해 공사 현장을 전전하며 일용직 근로자로 일해야만 했다.
좋은 학벌과 거기서 생겨난 든든한 인맥, 그리고 집안의 탄탄한 재력까지 갖춘 다른 정치인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처지였다. 그는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앞서 있던 사람들과 맞서야만 했다.
애초에 남들보다 불리한 조건을 안고 정치에 뛰어든 그였기에 남과 똑같은 방식으로 경쟁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잘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싸워 이기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바로 글쓰기였다. 글을 통해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나가고, 이 브랜드를 바탕으로 자신을 응원하는 지지층을 만들어내겠다고 말이다.
브랜드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다
《여보, 나 좀 도와줘》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자신이 정치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인지, 정치를 시작한 뒤 자신이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자신의 꿈과 목표는 무엇인지 알리기 위한 그의 첫 번째 시도였다.
겉으로는 “돈을 좀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글을 썼다”, “편안하게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펜을 들기로 마음먹었다”, “잊히고 싶지 않아서 책을 썼다”는 등의 이유를 말했지만 그가 글을 쓴 진짜 이유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브랜드야말로 자기 자신을 국회의사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다른 국회의원들과 구별되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역대 한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읽기 쉬운 글을 썼던 인물로 꼽힌다. 유려하고 세련된 문체 대신 쉬운 단어와 표현으로 자기 생각을 논리 정연하면서도 읽기 편하게 풀어냈다.
그가 단독 저자로 돼 있는 책은 모두 일곱 권인데, 그중 그가 살아생전에 쓴 책은 《여보, 나 좀 도와줘》, 《노무현이 만난 링컨》,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 이렇게 세 권이다. 나머지 책들은 모두 그가 세상을 떠난뒤 평소에 써두었던 글들을 묶어서 펴낸 것이다.
살아생전 틈틈이 썼던 글들을 모아 여러 권의 책을 낼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나 많은 글을 써왔는지 알 수 있다.
젊은 시절 울산에 있는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 목재에 얻어맞아 이가 부러지고 입술이 찢어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했던 일도 글쓰기였다.
병원에 있으면서 두 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는데 고향 집에 보관해뒀던 원고는 잃어버렸다고 한다. 간호사를 짝사랑한 어느 젊은 ‘노가다’의 이야기다.
글 쓰는 일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그가 낙선 정치인이던 자신의 처지를 역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글을 택한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독서와 글쓰기를 즐겼던 만큼 글이 지니는 위력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리라.
(지금 읽고 계신 이 글은 <최고의 리더는 글을 쓴다> 130~138페이지에 실린 글입니다.)
가장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며 첫 문장을 시작하다
그는 《여보, 나 좀 도와줘》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솔직하고 거침이 없다”, “기존 엘리트 정치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물이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바보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그의 정체성이 만들어진 곳이 바로 이 책이었다.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먹고삽니까?”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러한 외침으로 시작된다. 그에게 10여 년 동안 두고두고 부끄러움과 후회를 남겼던 한마디다. 그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사기 혐의로 구속된 남편의 변호를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구속되기는 했지만 사실 사건은 별것 아니었다. 당사자들끼리 잘 말해서 합의만 하면 재판까지 갈 필요도 없는 사소한 사건이었다.
변호사인 그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마침 그때 돈이 떨어져서 쩔쩔매던 노무현은 모른 척 사건을 맡았다. 일단 의뢰인을 접견하면 사건 의뢰를 취소한다고 해도 돈을 돌려주지 않아도 됐기에 아주머니가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노무현은 바로 구치소로 달려가 그 남편을 만났다.
다음 날 아주머니가 찾아와 당사자끼리 합의를 봤다며 계약금 60만 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속으로는 미안했지만 “어제 남편을 접견했기 때문에 변호사 수임 규정에 따라 돈을 돌려줄 수 없다”고 버텼고 결국 몇 시간의 실랑이 끝에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무실을 나갔다.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먹고삽니까?”라는 한마디를 남기고서. 울면서 사무실을 나가던 아주머니의 뒷모습은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한동안 나는 그 일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훨씬 뒤 내가 인권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언제부터인지 그 아주머니에 대한 기억이 나를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법정에 서서 주먹을 흔들며 양심을 거론할 때는 어김없이 그 아주머니의 얼굴이 나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회의원이 되고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되고부터는, 그 아주머니가 던진 말 한마디가 가슴에 꽂힌 화살처럼 더욱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돈에 탐 안 내고 인권 변호사로서 오로지 사회정의를 위해 헌신해온 사람이라고 신문이나 잡지에 기사가 나갈 때마다, 어디선가 그 아주머니가 그 글을 읽고 있지나 않을까, 나는 가슴을 졸이곤 했다.”
솔직한 글은 감동과 매력을 남긴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건 용기가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인권 변호사, 청문회 스타,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던 그에게 돈 몇 푼에 눈이 어두워 불쌍한 아주머니를 등쳐먹었던 과거를 밝히는 건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남의 불행을 이용해 돈이나 우려내는 악덕 변호사를 좋아할 유권자는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이 사실을 말한다. 아니, 아예 이 과거를 고백하는 걸로 책을 시작한다. 자신의 잘못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자만이 진정 큰 신뢰를 얻을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승부사로 불리는 그답게 그는 글에서도 모험을 한다.
자신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털어놓음으로써 오히려 더 큰 믿음을 얻어낸다.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과장하고 뽐내려는 그저 그런 정치인들과 달리 그는 가장 지우고 싶은 기억을 맨 앞에 끌어내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나는 이 한마디에 담겨 있는 부끄러운 기억을 먼저 끄집어내는 것으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숨기는 한, 내 삶의어떠한 고백도 결국 거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글을 읽는다면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에는 단 한 점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이 정도 잘못까지 밝힐 만큼 솔직한 사람이라면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바보 노무현’이라는 브랜드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돈에 쪼들리던 낙선 정치인이 역전의 발판을 만들어내는 순간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브랜드가 그의 이후 정치 인생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는 한국 정치 역사상 최초로 대중적 팬덤을 만들어낸 정치인이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이유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노무현이라는 사람에게 끌려서 그를 응원하고 따르는 팬들을 만들어냈다. 덕분에 그는 대통령이 됐다. 선거에서 낙선하고 축 늘어진 채 지내던 그가 8년 뒤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첫걸음은 바로 글이었다.
홍선표 작가 / 한국경제신문 기자
<최고의 리더는 글을 쓴다>, <내게 유리한 판을 만들라>
<홍선표 기자의 써먹는 경제상식>, <리치 파머, 한국의 젊은 부자농부들>
rickeygo@naver.com
(방금 읽으신 이 글은 <최고의 리더는 글을 쓴다>의 본문 130~138페이지에 실린 글입니다. 제프 베이조스, 빌 게이츠, 일론 머스크, 이나모리 가즈오, 레이 달리오 등 최고의 리더 19인이 글을 쓴 이유 5가지와 글을 씀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5가지 성과를 쉽고, 깊이있게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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