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그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몇줄의 글이 한국을 뒤흔들었던 이유
1971년 4월 9일, 이날 한국의 모든 신문엔 한 기업인이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장에 대한 기사가 큼지막하게 실렸다.
한 달 전 그의 장례식이 치러졌을 때 수많은 곳에서 조화를 보내는 바람에 서울 시내 모든 꽃집의 꽃들이 다 동났을 정도로 그는 큰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보다 더 큰 추모 열기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몇 줄 안 되는 짧은 유언장에 담긴 마지막 문장은 그동안 한국 사회가 겪어보지 못했던 큰 울림을 줬다.
“내 소유인 유한양행 주식 14만 941주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보육신탁기금>에 기증함으로써 뜻있는 사회사업과 교육 사업에 쓰도록 하라”
유한양행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유언장의 주인공은 유일한 박사다.
유한양행 대표나 사장, 회장이라는 기업인으로서의 호칭보다는 박사라는 호칭이 훨씬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그가 탁월한 기업인을 넘어 큰 교육자이자 올곧은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이다.
유일한 박사는 오늘날에도 한국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는 기업인이다.
1904년, 가족과 헤어져 홀로 미국으로 떠난 아홉 살 꼬마 유일한은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해야만 했다. 자기 힘으로 학비를 벌어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친 그는 졸업 이후 제너렐 일렉트릭에 입사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부에서 뛰면서 익혔던(유일한 박사는 미식축구 장학생으로 뽑힌 덕분에 고등학교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팀워크와 리더십
그리고 대학생 시절 중국에서 수입한 잡화를 중국 이민자들에게 파는 사업으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던 사업 수완 덕분에 그는 회사에서도 빠르게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입사한 지 몇 년 안돼 회사로부터 ‘동양 시장 판매 총책임자’라는 임원 자리를 제안받았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회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한다.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가 미국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 경제력을 바탕으로 조국 독립에 보탬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귀국할 때를 생각하면 이제는 사업을 통해 부를 쌓아야 할 시점이 됐다고 생각했다.
‘내 사업을 하면 제너럴 일렉트릭 임원으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20대다운 자신감도 있었다.
숙주나물 통조림이란 혁신으로 미국에서 큰 부를 쌓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첫 번째 회사인 ‘라초이 식품회사’(La Choy Food Product Inc.)를 창업했고, 몇 년 안 가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26년 그의 회사가 한 해 동안 벌어들인 영업이익은 50만 달러에 달했다.
100년 전인 당시에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그의 성공은 바다 건너 고국에까지 전해져 ‘미국에서 나물 장사를 하는 유일한이라는 청년이 백만장자가 되었다더라’라는 기사가 한국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개발하는 자세야말로 이 같은 성공을 만들어낸 밑바탕이었다.
라초이 식품회사를 키운 일등공신은 숙주나물 통조림이었다. 1920년대 미국에선 숙주나물을 찾는 수요가 크게 늘었다.
중국인 이민자들에게 숙주나물은 주식인 만두 속을 채우는 필수 식재료였고, 중국 음식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숙주나물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렇게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던 숙주나물이었지만 공급은 언제나 모자랐다. 어떤 채소보다도 쉽게 상해버리는 특성 탓에 숙주나물을 대량으로 장기간 보관하고 유통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유일한 박사는 숙주나물 통조림을 발명함으로써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성공의 발판을 마련한다. 몇 달 동안 집 지하실을 개조해서 만든 연구실에 틀어박혀 실험에 몰두한 끝에 얻어낸 성과였다.
그의 회사는 통조림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소비자들에게 신선한 숙주나물을 제공할 수 있게 됐고, 덕분에 회사도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26년 유일한 박사는 중국인 부인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다. 아홉 살의 나이에 홀로 조국을 떠났던 꼬마가 서른한 살의 당당한 사업가가 돼서 조국 땅을 다시 밟는 순간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동포들을 위해 유한양행을 창업한다.
연희전문 상학과 교수, 지금으로 치면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를 맡아달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독립을 위해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일은 경제력을 쌓는 일이라고 생각한 그는 학자의 길을 선택하는 대신 계속해서 사업가로 남기로 결심한다.
조국이 필요로 하는 사업에 뛰어들다
사업 초창기에는 미국에서 수입한 의약품을 전국 곳곳의 병원에 판매하는 일에 집중했다.
알약 몇 개만 먹으면 쉽게 나을 수 있는 병이지만 약을 구하지 못해 계속해서 병에 시달리고, 심하게는 죽기까지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은 질 좋고 값싼 약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약만 수입했던 게 아니다. 수백 년 전에 썼던 것과 똑같은 농기구로 농사지으면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 정도의 수확만을 거두는 농민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던 그는 미국의 최신 농기계와 농기구도 수입해서 판매한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파는 것이었기 때문에 회사의 이윤을 남기지 않고, 원가 그대로 판매했다.
어느 정도 회사를 키운 뒤에는 기술 개발에 집중 투자해 유한양행 상표를 단 자체 상품을 내놓는다.
이렇게 생산된 유한양행 제품들은 버들표 상표를 달고 한국은 물론 만주, 중국 본토, 중국 서북부, 대만, 일본 오사카 지역에까지 뻗어 나간다. 베트남 하노이와 호치민에까지 유한양행 제품들이 수출됐다.
유한양행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글로벌 기업인 이유다.
조국이 해방된 이후, 노년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유일한 박사는 자신이 진정으로 이루길 원했던 일에 도전한다.
오랜 식민지배에서 갓 벗어난 조국에 가장 필요한 존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갈 역량을 갖춘 교육받은 인재라고 생각한 그는 교육 사업에 남은 일생을 헌신한다.
교육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업이다
교육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던 유한양행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업이었다.
그는 사재를 들여 유한전문학교, 유한중·고등학교 등 여러 교육기관을 설립했고, 앞서 살펴봤듯 마지막 유언을 통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교육 사업에 기부한다.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은 순위를 정하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로 모두 중요한 명제들이다. 하지만 나에겐 바로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의 순위가 된다.”는 말을 통해 그가 평생을 통해 이루려 했던 가치들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유일한 박사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꼽히는 건 지금껏 살펴본 그의 업적 덕분이다.
그는 언제나 개인의 이익보다 더 큰 가치를 추구했고, 지금 당장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살펴본 뒤 과감하게 도전해 최고의 성과를 만들어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참된 스승으로 여기며 그의 모습을 닮으려 노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1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독립 결의문을 쓰고, 낭독하다
그런데 이렇듯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는 유일한 박사지만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그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선언문의 작성자라는 사실 말이다.
그가 1919년에 쓴 이 글에는 독립에 대한 한국인들의 강렬한 염원과 함께 스물네 살 대학생 유일한이 앞으로 살면서 평생에 걸쳐 추구해나갈 목표가 담겨있다.
그가 쓴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제법 길게 살펴봤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이뤄낸 성과를 알고 있기에 그가 글을 통해 세웠던 목표를 더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최고의 리더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글쓰기는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이를 반드시 이루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행동이었다.
(지금 읽고 계신 이 글은 아쉽게도 책 <최고의 리더는 글을 쓴다>에 실리지 못한 미발표 원고입니다.)
1919년 4월 14일,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작은 극장으로 한 무리의 한국인들이 모여들었다. 한 달 전 한국에서 있었던 3·1 운동의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미국 거주 한인들도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기 위해 ‘한인자유대회’라는 이름의 행사를 열기로 결정했다.
미국 각지에서 선출된 한인 대표들은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미시건대학에 재학 중이던 스물네 살 유일한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사흘간 치러졌던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는 마지막 날에 있었던 결의문 발표 행사였다. 모두 네 건의 결의문이 작성돼 발표됐는데 마지막 성명서의 제목은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선언하는 결의문>이었다.
독립된 주권국가로서의 한국이 어떤 제도와 정신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하는지를 밝히는 글이었다. 한국인들의 꿈과 미래를 담아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평생에 걸쳐 실천할 사명을 글로 담아내다
유일한은 헨리 김, 조운우라는 다른 두 명과 함께 이 결의문 작성 작업을 맡았고, 청중들 앞에서 자신의 글을 직접 읽어 내려갔다. 결의문을 낭독하는 모습을 통해 그가 결의문 작성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결의문은 모두 10개 조항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앞으로 유일한이 걸어갈 삶을 예견하고 있는 문장들만 살펴보자.
“우리는 ‘세계 모든 국가와의 자유무역’을 원하며, 타 국민과의 협조 밑에 공평히 상공업을 발전시킨다.”
“우리는 모든 정부의 정책 활동보다도 ‘민중의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민중의 건강’은 의사들이 첫째로 고려할 일이며, 우리는 과학적인 감독 하의 현대적 건강 증진을 믿는다.”
“우리는 ‘자유로운 언론과 출판’을 믿는다. 우리는 공평한 기회, 합리적인 경제정책, 세계 각국과의 자유로운 교역 등 전체 국민의 발전을 위해 가장 유망한 여건을 형성시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전적으로 따른다.”
상공업을 통한 경제 발전, 자유무역을 통한 국부의 증진, 그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 현대 의학을 활용한 국민들의 건강 증진,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 몇 줄 안 되는 문장에 이후 유일한이 추구해나가는 모든 가치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담겨있다.
필라델피아의 한 작은 극장에서 먹고, 자며 신생 독립국이 추구해야만 하는 원칙들을 고민했던 나흘 동안의 시간은 유일한 개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신념을 세워가는 과정이었다.
독립 이후 조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했던 그는 이 같은 전진에 자신이 보탬이 될 수 있는 방법 역시 치열하고 고민했게, 이때 정한 원칙들을 자기 삶의 목표로 삼았다.
사업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에도 그는 틈이 날 때면 언제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데 시간을 보냈다. 독서와 글쓰기야말로 그가 현실의 압박감에서 벗어나 더 넓은 관점으로 자신과 사회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안식처였다.
큰 리더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글을 쓴다
아쉽게도 그가 썼던 글들의 대부분은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글은 한 권의 책과 한 편의 소논문뿐이다.
두 편 모두 모두 영문으로 썼는데 1928년에 썼던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이란 책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미국에 머물면서 썼던 <한국과의 교역을 권하다>(Do Business with KOREA)라는 제목의 소논문은 ‘아시아와 아메리카’라는 저널에 기고했던 글이다.
전쟁 당시 미군 자문위원으로 일한 덕분에 남들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전쟁의 판세를 예측할 수 있었던 그는 얼마 뒤면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국의 승전은 곧 한국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세계 최대의 시장인 미국과의 교역이 필수적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미국 정부 관리와 기업인들에게 한국과 한국인들에겐 미국이 필요로 하는 여러 물품을 생산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으며, 한국에 대한 투자는 미국 기업에게도 이로운 일이라는 걸 설득하기 위해 펜을 잡았다.
미래에 다가올 큰 기회를 예측하고, 기회를 거머쥐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야말로 지금껏 살펴본 최고의 리더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다.
미국을 떠나 한국에 다시 뿌리를 내린 지 45년이 지난 1971년 3월 11일, 그는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이로부터 한 달 뒤 공개된 그의 유언장은 한국 사회를 뒤흔들며, 장례식 당시보다 더 큰 추모 열기가 피어오르게 만든다.
다음이 그가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손녀 유일린의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으로, 나의 주식 배당금 가운데서 1만 달러 정도를 마련하라.”
“영애(딸) 유재라에게는 유한 중·고등학교 구내에 있는 묘소(자신의 묘지) 및 주변 대지 5000평을 상속하되, 이를 유한동산으로 꾸며주기를 바란다."
"유한동산에는 결코 울타리 따위는 치지 말 것이며 유한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그 어린 티 없는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보고 느끼게 해 달라”
“영식(아들) 유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
“내 소유인 유한양행 주식 14만 941주(1971년 당시 시가 2억 2500만 원)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보육신탁기금>에 기증함으로써 뜻있는 사회사업과 교육 사업에 쓰도록 하라”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 달 뒤인 1971년 4월 8일, 유한양행 사장실에서 공개된 유언장]
홍선표 작가
<최고의 리더는 글을 쓴다>, <내게 유리한 판을 만들라>
<홍선표 기자의 써먹는 경제상식>, <리치 파머, 한국의 젊은 부자농부들>
rickeygo@naver.com
(방금 읽으신 이 글은 아쉽게도 책 <최고의 리더는 글을 쓴다>에 실리지 못한 미발표 원고입니다. <글을 쓴다>를 읽으시면 제프 베이조스, 빌 게이츠, 일론 머스크, 이나모리 가즈오, 레이 달리오 등 최고의 리더 19인이 글을 쓴 이유 5가지와 글을 씀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5가지 성과를 쉽고, 깊이있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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