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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 Jun 14. 2020

인턴 나부랭이는 무슨 일을 할까? (일 안 함)

제발 나에게 일을 줘, 제발, 제발!

내가 UN에 들어가다니, 꿈이야 생시야. 난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까? 한낮 인턴 나부랭이지만 UN은 다르겠지…?! 시키는 일 다 뽀개고, 일도 더 만들어서 하고 인정받을 거야!!!


거의 반년 간의 기다림 끝에 받은 UN 인턴 합격 통보. 감개무량합니다. 입사지원만큼 복잡한 비자/보험 준비 등을 끝내고 올라탄 독일행 비행기. 그때 나이 23살. 첫 직장. 2013년 1월. 유달리도 춥고 하늘이 어두웠던 독일의 겨울, 패기롭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출근했습니다. 


(좌) 퍼온 이미지 / (우) 내 첫출근 날씨... 차이 무엇



출근 첫날


1층에 도착해서 인사 담당자에게 전화를 겁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왔다 갔다 어슬렁거리기를 십 여분, 빨간 머리에 안경을 낀 푸근한 인상의 여자분이 빙그레 웃으며 내려옵니다. 상투적인 환영인사와 특별할 것도 없는 날씨 얘기를 나누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탑니다. 엘리베이터는 현대 과학 기술의 결정체인 듯 엄청난 속도로 올라갑니다. 사원증을 발급받고, 자리 세팅하고, 프린터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등의 기본적인 업무를 안내받습니다. 사원증은 그야말로 촌스럽기 짝이 없는 파란색인데, 당일 즉석사진을 찍어 한가운데 박아줍니다. 나름 UN이기 때문에 보안이 철저해서 바깥쪽 회전 출입문, 그리고 건물로 들어가는 유리 출입문에 각각 두 번 태깅을 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흉측한 사원증. 안 본 눈 사요...


기본적인 세팅이 완료되고, ‘자, 이제 뭘 하면 될까요? 할 일을 주세요!’라고 외치기도 전에. 같은 팀의 팀원이 저의 직속 상사가 감기로 병가를 내서 2주간 출근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알려줍니다. 

Holy shit…

당황해서 흔들리는 제 동공을 본 팀원이 회사 소개 브로셔, 보고서 등을 잔뜩 가져다줍니다. ‘이거라도 읽고 계세요…’ 일을 줄 사람이 없다니. 영어 공부도 할 겸 회사 파악도 할 겸 닥치는 대로 읽습니다. 잠이 옵니다. 점심시간 즈음이 된 듯한데 밥을 어떻게 먹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세 명이 쓰던 사무실을 저 혼자 쓰고 있었습니다) 


혼자 썼던 사무실, 자리는 꽤 넓지만.. 외계인 모니터가 돋보입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슬슬 현실이 직시됩니다. 그렇군요. 인턴은 말 그대로 인턴 나부랭이,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메일 주소도 이름이 아니라 ‘intern3’이었습니다.)

퇴근 시간이 되었는데 퇴근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신경 쓰는 사람도 없으니 집에 가도 되겠죠. 그렇게 짐 싸서 퇴근했습니다. 집 가는 길에 마트를 들려 맥주랑 먹거리를 왕창 샀습니다. 알코올을 기도로 넘기며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하지만 나는 잡초 같은 사람이니까 극복할 거야... (그날 밤은 몹시 춥고 길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출근날


다음 날. 큰 맘먹고 옆 사무실 문을 두드립니다. (다른 글에서 썼든 저는 천성이 대. 단. 히 소심한 사람입니다) 제 나이 또래의 여직원이 들어가는 것을 봤거든요. ‘나 어제부터 출근했는데 혹시 잠시 티타임 할 시간 되실…?’ 용기를 내서 말합니다.
‘오, 네가 한국에서 온다는 걔구나. 반가워!’ 밝게 저를 맞아준 그녀는 중국 출신의 20대 후반 계약직 직원이었습니다. 그녀는 팀원 구성, 구내식당 위치, 근처의 먹을 만한 곳, 팀 분위기 등을 쏟아내듯 얘기합니다. 그리고 원래 인턴은 일이 별로 없으며 (물론 본인이 하기 나름이긴 하지만, 큰 욕심 내지 말라네요) 당분간은 회사 자료를 보면서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지라고 덧붙입니다. ‘네, 조언 감사합니다.’ 

※ 실제로 직원 수만큼 많은 인턴이 짧으면 1개월 길면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무수히 오고 가기 때문에 대부분 존재감이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첫 2주간, 업무시간에 한 것은 네이버 레시피에서 먹고 싶은 음식 요리법 검색이었습니다. 퇴근하면서 장보고 저녁엔 요리해서 와인이랑 같이 먹었습니다. 이래도 되는 걸까. (덕분에 요리 실력은 일취월장하는데…) 

마파두부 정도는 껌이죠?



2주 후 드디어 상사 출근!


오매불망 2주를 기다려 드디어 직속 상사가 출근했습니다. 고집 세 보이지만 속은 따뜻할 것 같은 독일인 아주머니입니다. 하지만 Wow… 2주간 쉬고 온 그녀에겐 쌓인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인턴에게 일을 알려주면서 시키기보다는 본인이 쳐내는 게 빠르겠지요. 일을 안 주십니다. 그래도 근성을 10분 발휘하여 ‘뭐 도와드릴 것 없을까요’ 하고 기웃거려봅니다. 


상사 : 홈페이지에 회원사 180개국의 보고서가 업로드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없는 곳은 리스트 추려 메일로 보고서 요청하세요.


2주 만에 받은 첫 업무입니다! (신난다) 분량이 적진 않지만 단순 업무라 금방 끝내고 다시 기웃거립니다. 생각보다 일을 빨리 끝냈더니 상사의 동공이 흔들립니다. 무슨 일을 줘야 얘가 날 안 귀찮게 할까…?


상사 : UN은 매년 국제회의 후 공식 문서를 만들어요. 전년도만 해도 20편의 문서가 있고, 긴 것은 100장이 넘어가는 분량입니다. 이것을 한 페이지로 정리하는 인포그래픽을 만들어보세요.

진짜 읽기 싫게 생긴 UN 공식 문서


나 : 인포그래픽…? 이 뭐죠? (진심 그때 처음 들음)

상사 : 인포그래픽은 인포메이션과 그래픽의 합성어예요. 정보를 이미지로 시각화해서 전달하는 것이죠. UN 문서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보세요. 기한은 따로 없으니까 한번 해보고 어려우면 말씀해주세요.


☞ 이해한 바로는, 100장이 넘는 UN 공식 문서를 한 장의 포스터스러운 것으로 만들라는 건데? 
① 다 읽고 요약하고. 그리고 ② 포토샵 같은 툴로 디자인 작업도 해야 되는 거네? ^^; 이거 가능한 부분? 
(나중에 알았지만 상사는 제가 이걸 해낼 거라고 1%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게 인포그래픽입니다...


하지만 의지의 한국인, 잡초 근성으로 어떻게든 해봐야죠. 그때부터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독학하고 UN 문서와 씨름하길 수일… 마침내 만들어낸 결과물, 그 결과물 덕에 UN 사무총장을 만나고 전 직원 대상 교육까지 하게 되는데…

존재감 없던 인턴 나부랭이가 UN 구성원으로서 발자취를 남기는 썰, 다음 편에서 풀겠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 기깔나고 간지나게 살아야지.
누구보다 찬란하고 눈부시게.



Upcoming.. 목차


· 인턴 나부랭이는 무슨 일을 할까? (2 - 꽤 괜찮은 일 편 ; 국제회의 지원)

· 인턴 나부랭이는 무슨 일을 할까? (3 - 자랑할만한 일 편 ; 직원 교육)

· ★ (번외 특집) 장거리 연애를 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

· 인턴십이 끝나고... 이제 뭐 먹고살지?

· 환경부 장관을 대상으로 소송을 걸다 (석유화학회사 근무기)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을 찾다

· 에필로그


(부록) 

· UN 붙었다고 끝이 아니다. 출국 전 준비해야 할 A to Z (피곤 주의)

· 독일에서 둥지 틀기 - 완벽한 워라밸이란 이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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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누리

운동과 술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 석유화학회사를 때려치우고 와인 공부하다 스타트업에 정착했다. 2019년 한 해동안 1,200개 가 넘는 커뮤니티 이벤트를 개최했다. (자칭 이벤트 전문가) 창의성과 영감이 샘솟는 삶을 위해, 인생을 변화시킨 사람과 문장들을 수집 중이다. 


(현) 패스트파이브 커뮤니티 크리에이터팀

(전) 독일 UNCCD(유엔사막화 방지기구) FCMI 팀

석유화학회사 환경안전경영팀

서울대학교 과학교육, 글로벌환경경영 전공

산림청 주관, 유네스코 - DMZ 지역 산림 생태 연구 인턴

한국장학재단 홍보 대사

4-H 동시통역사, 캐나다 파견 대표

서울대학교 아시아 연구소 1기 인턴 팀장

서울대학교 국제 협력본부 학생대사 이벤트 팀장

와인 21 객원 기자, 레뱅드매일, 파이니스트 와인 수입사 홍보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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