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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 Jun 20. 2020

인턴 나부랭이는 무슨 일을 할까? (어쩌다 중요한 일)

왜 이렇게 일이 잘 풀리는거지..?

[지난 글 요약]

호기로운 첫 출근. 그런데 직속 상사가 2주간 병가! 나 무슨 일 해야 해? 나에게 일을 줘… 

마침내 상사가 돌아왔지만 업무 가르쳐줄 시간이 없나 봅니다(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무슨 일 할까요? 도와드릴 것 없어요?’ 하고 알짱거리는 인턴에게 상사는 폭탄을 투척하는데…


UN 공식문서를 한 장의 인포그래픽으로 만드세요.
(= 읽고 요약해서 포스터로 만들어라)



시작해볼까...?


심호흡하고 자리로 돌아옵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공식문서를 다운로드합니다. 문서는 총 18편, 짧은 건 30페이지 정도 긴 것은 100쪽이 넘습니다. ‘그래, 다 합치면 1000장 정도는 되겠네. 폰트는 또 얼마나 작은지 돋보기를 써야 할 판이군’. 영어도 못하는데 단어들은 또 어찌나 어려운지요. 

보기만해도 토나오는 문서

포스터를 만들려면 디자인 툴을 활용해야 할 텐데, 포토샵은 초등학생 때 컴퓨터 학원에서 배운 게 전부입니다. (엄마, 학원 보내줘서 고마워) 총체적 난국입니다. 인생 뭐 하나 쉬운 게 없지요. 동시에 가슴이 살포시 뜁니다. 


그래도 이거 꽤나 재밌겠네?


우선 첫 번째 문서를 읽기 시작합니다. 120여 페이지, 첫 번째라 중요해서인지 더럽게 기네요. 잠이 옵니다. 꾸역꾸역 읽다 보니 요령이 좀 붙습니다. 대학교 과제할 때 논문 맨 앞 뒤만 참고 해서 짜깁기하던 실력을 발휘합니다. 목차에 따라 꼭지를 나누고 가장 중요한 문장들만 뽑아 이어 붙입니다. 야매(?)로 열심히 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문서를 요약하는데만 꼬박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시험기간보다 더 열심히 했다...


이제 디자인 작업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다른 회사의 인포그래픽 자료를 찾아봅니다. 메인타이틀, 서브 타이틀, 요약문, 그래프, 지도 등… 대에충 감이 올 듯도 합니다. 빈 A4용지를 한참 들여보다가 연필로 슥슥 그림을 그렸다 지웠다를 한참, 이제 컴퓨터로 그려볼까요. 파워포인트를 켭니다. 내 주제에 포토샵은 무슨. 파워포인트는 만능이니까요. 데이터 관리하는 타 부서 직원에게 메일을 보내 인포그래픽에 넣을만한 사진과 로고를 받습니다.  


노가다로 도형을 삽입해 섹션을 분리하고 꾸역꾸역 그래프를 만듭니다. 제목 폰트는 내가 좋아하는 나눔손글씨로, 본문은 나눔고딕으로 골랐습니다. 그렇게 밤낮으로 작업해서 일주일 만에 하나의 문서를 인포그래픽으로 만들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상사에게 일 달라고 귀찮게 안 해서 좋았을 겁니다 허허) 

파워포인트로 만든 인포그래픽 초안 


두 번째 문서부터는 속도가 좀 붙습니다. 첫 번째 문서의 템플릿에서 색을 조절하고 사진만 바꿨는데 꽤나 그럴듯합니다. 물론 지금 보면 촌스럽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나름 만족할 때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쳐 상사에게 보고합니다.



일이 커지기 시작하다


나 : 이전에 요청하신 건, 일단 샘플로 두 개 만들어보았습니다. 의견 부탁드려요.
상사 : 응?


좀처럼 표정이 없는 무뚝뚝한 독일 아줌마의 동공이 커집니다. 아마 이런 업무를 줬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꼼꼼히 인포그래픽을 살펴보더니 몇 가지 오탈자를 짚어줍니다. 그리고 씩 웃으며 얘기합니다. 


괜찮네요. 일단 몇 개만 더 샘플로 작업해서 팀 워크숍 때 발표해주시겠어요? 어떻게 활용할지 같이 고민해봅시다.


(칭찬받았다) 기꺼이요. 3개 문서를 추가 작업해서 발표 자료를 만듭니다. 팀 워크숍은 Poland (그 폴란드가 아니라 독일의 지역 이름)에 위치한 직속 상사의 집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같이 식사하고 산책하고 드디어 발표시간.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X 100) 영어 발표 울렁증이 있지만 어쩌겠어요. 해야지. 


상사의 집에서 워크숍을 한 특이한 경험. 가운데 계신 상무님께서 유달리 피곤해 보이시네요.. ;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정신없는 발표가 끝나자 직원들이 열렬하게 손뼉 치며 한 두 마디씩 칭찬을 해줍니다. 구석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상무님이 말씀하십니다.


일단 회사 홈페이지에 업데이트하고, 조만간 있을 국제회의 때 배포해도 좋을 것 같은데요. 다음 주 임원회의 때 사무총장님께 보고 드립시다. 


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임원회의에서 사무총장을 영접


일이 커지네요.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직속 상사는 세상 친절하게 인포그래픽 워딩 수정을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다음 주 임원회의. 인쇄한 인포그래픽을 자리마다 가지런히 놓아두고 얼음처럼 굳어 있습니다. 사무총장은 빠른 속도로 자료를 훑어본 후, 다음 달 예정된 국제회의 때 유용하게 활용해보자고 제안합니다. 단, 지금 디자인은 톤 앤 매너가 맞지 않아 전반적 수정이 필요하답니다.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컬러, 폰트가 있다고 하네요. (왜 처음부터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거야… ) 샤방샤방 소녀 감성은 먹히지 않습니다. BI, CI 이런 거 하나도 몰랐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사무총장은 작업하기 편하도록 일러스트레이터랑 포토샵을 설치해주겠다고 합니다. 어차피 사용법은 모르는데…? 뭐, 배우면서 하는 거죠. 네이버 블로그에 의존하여 이것저것 기능을 만져봅니다. 쓰다 보니 확실히 파워포인트로 작업하는 것보다는 훨 낫습니다. 


공식 폰트와 색으로 수정한 버전


그렇게 꼭 한 달이 걸려 총 18편의 공식 문서를 인포그래픽으로 제작 완료합니다. 인포그래픽은 공식 홈페이지에 실렸고, 국제회의 굿즈인 USB에 담겨 배포되었으며, 사무총장의 기조연설 때 배경으로 재생되었습니다. 


국제회의 현장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행운입니다. 상사가 툭하고 던진 업무가 그래도 그나마 잘 맞고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UN 직원 대부분이 워드프로세서 빼곤 다른 툴을 잘 다루지 못합니다. IT 강국 한국 만세) 



직원 대상으로 교육을 해달라고요?


2주간 정신없이 진행된 국제회의가 끝나고 오래지 않아, 인사팀 직원이 저를 찾아옵니다. 

누리, hoxy… 직원들 대상으로 인포그래픽 강의를 해줄 수 있어요? 사람들이 엄청 관심이 많더라고요. 근데 절대 부담은 갖지 말고.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인포그래픽이라는 용어 자체를 들어본 적도 없는데? UN 직원을 대상으로 강의라고? 내가?)

앵콜 요청까지 받은 사내 강의, 그리고 그 이후의 변화 썰, 다음 글에서 풀겠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 기깔나고 간지나게 살아야지.
누구보다 찬란하고 눈부시게.



Upcoming.. 목차


· 인턴 나부랭이는 무슨 일을 할까? (3 - 자랑할만한 일 편 ; 직원 교육)

· ★ (번외 특집) 장거리 연애를 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

· 인턴십이 끝나고... 이제 뭐 먹고살지?

· 환경부 장관을 대상으로 소송을 걸다 (석유화학회사 근무기)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을 찾다

· 에필로그


(부록) 

· UN 붙었다고 끝이 아니다. 출국 전 준비해야 할 A to Z (피곤 주의)

· 독일에서 둥지 틀기 - 완벽한 워라밸이란 이런 것?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윤누리

운동과 술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 석유화학회사를 때려치우고 와인 공부하다 스타트업에 정착했다. 2019년 한 해동안 1,200개 가 넘는 커뮤니티 이벤트를 개최했다. (자칭 이벤트 전문가) 창의성과 영감이 샘솟는 삶을 위해, 인생을 변화시킨 사람과 문장들을 수집 중이다. 


(현) 패스트파이브 커뮤니티 크리에이터팀

(전) 독일 UNCCD(유엔사막화 방지기구) FCMI 팀

석유화학회사 환경안전경영팀

서울대학교 과학교육, 글로벌환경경영 전공

산림청 주관, 유네스코 - DMZ 지역 산림 생태 연구 인턴

한국장학재단 홍보 대사

4-H 동시통역사, 캐나다 파견 대표

서울대학교 아시아 연구소 1기 인턴 팀장

서울대학교 국제 협력본부 학생대사 이벤트 팀장

와인 21 객원 기자, 레뱅드매일, 파이니스트 와인 수입사 홍보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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