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15km를 초월하는 4차원 연애법 (독일-한국)
UN에 혈혈단신 잡초같이 뿌리내리는 당찬 에피소드를 줄줄 풀어냈지만... 당시 나이 23살. 나름 꽃다운 (물론 지금도 꽃답...?) 시기. 저에게도 소녀 감성, 사랑이란 단어가 봄날 여의도 공원에서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그득했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사람은 일만 하고는 살 수 없으니까... 간만에 노잼 UN 에피소드를 넣어두고 장거리 연애사를 살짝 풀어내려 합니다. (TMI 주의, 오글거림을 싫어하신다면 조용히 뒤로 가기 눌러주세요)
※ 지금은 어디서 무엇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 이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 썰을 풀어낸 점. 그에게 사과를 구합니다.
남자친구와 교제를 시작한 것은 제가 독일 출국하기 한 달 전이었습니다. (응? 도대체 왜) 같은 학교 선배였던 그는 오다가다 수업에서 마주칠 뿐 몇 마디 말도 섞어본 적 없는, 말 그대로 이름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짙은 속눈썹에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 유달리 눈에 띄는 사람이긴 했어요. 어쨌든 ... 몇 가지 계기 덕에, 우린 일주일에 세네번은 밥을 같이 먹을 정도로 급격히 가까워졌습니다. (좋아해. 많이 좋아해.) 이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것은, UN 입사로 한 달 후에 독일행 비행기에 올라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요. 그런 내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건 선배였습니다.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한 달 후 최소 6개월 간 장거리를 해야해. 너도, 나도 이걸 너무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더 조심스럽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더 후회할거야. 좋아해. 많이 좋아해.'
교제를 시작하고 한달 후, 우리에겐 8,415km의 거리와 7시간의 시차라는 장벽이 생겼습니다. 머리를 조금 굴려보니 생각보다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데이트할 방법이 있더라구요. 단, 시차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시간을 맞춰주는 한 쪽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오후 5시에 퇴근을 하더라도 한국은 이미 밤 12시. 4시간 정도만 같이 노닥거리도 남자친구의 세계는 새벽 4시가 되버렸죠. 대학생이었던 제 (구) 남자 친구는 아무런 불만 없이 시간을 맞춰줬습니다. 지금도 참 고마워.
그럴듯한 쿠킹클래스는 아니지만, 함께 닭칼국수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각자 레시피를 열심히 조사해서 공유하고, 어떤 재료가 필요한지 꼼꼼히 메모합니다. 그리고 마트에 식재료를 사러 갑니다. 저는 독일의 마트, 남자 친구는 한국의 마트로요. 스카이프 통화는 계속 진행 중입니다.
'야, 오늘 코카콜라 1+1 행사해. 대박'
'돼지 고기 유통기한 임박한 거 땡처리 50%. 담주에 구워 먹어야겠다.'
'오늘 무슨 술 먹을 거야? 난 당연히 소맥. 자기는 와인?'
한참을 수다 떨며 양손 가득 장을 보고 집에 도착합니다. 독일과 한국에 있는 각자의 자취방입니다. 칼국수 면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하루 동안 냉장고에 재워둬야 더 맛있다네요. 팔에 근육이 생길 정도로 밀가루와 사투를 벌인 후 밀가루는 냉장고로 직행. 다음날 각자의 부엌에서 영상통화를 하며 본격적으로 칼국수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밀가루 반죽이 잘 밀리지 않는다는 둥, 칼이 잘 들지 않는다는 둥의 시답잖은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한참을 부엌에서 땀 흘린 결과 먹음직한 닭칼국수 한 그릇이 완성됩니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줄 알았으면... 다음에는 사 먹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각자 만든 칼국수를 다양한 각도로 몇 장이나 찍어 서로에게 보냅니다. (스카이프 영상통화는 화질이 안 좋거든요)
야, 내가 만든 거 대박. 이거 안 먹어본 거 너 천추의 한일 거다
이과생 아니랄까 봐, 남자 친구는 며칠 후 '사랑하는 누리와 함께하는 요리 및 실험 1'이라는 제목의 리포트를 보내왔습니다. (니가 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전액 장학금 받았지...)
오늘은 영화 데이트입니다. 남자 친구가 예전에 감명 깊게 봤다던 '폰부스'를 다시 보기로 합니다. 침대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맥주캔을 땁니다. (취이이이익... 캬~) '하나, 둘, 셋, 이제 재생'
각자의 침대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영화를 보며 맥주를 마십니다. 여전히 스카이프 통화는 진행 중.
'어떻게 전화 부스에서만 영화 찍는 게 가능해? 근데 진짜 하나도 안 지루하다.' '솔직히 남자 주인공이 쓰레기네'. 혼자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영화를 보며 같이 소오름 돋아줄 누군가가 지금 함께 있거든요.
저는 온라인 게임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랜선 데이트하기에 게임만한 것이 어딨겠어요. 하지만 제 게임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악입니다. (테트리스 초급방에서 50전 49패 수준) 그래서 운빨(?)이 중요한 동양화를 치기로 합니다.
'아니 어떻게 두 번을 연달아 X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화 수준은 유치원생의 그것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동양화를 양껏 감상한 후엔 서로의 마음을 알아보는 시간. 초등학교 때 (벌써 20년 전...) 힙했던 두근두근 캐치마인드에 도전합니다. 아직까지 넷마블이 이 서비스를 제공하다니, 존경스럽습니다. 다른 참가자들에게 엄청나게 발리고 나서 저흰 쓸쓸하게 퇴장...
제일 뒤에 쓰긴 했지만 사실 가장 많이 한 데이트는 술 마시기입니다. 각자 그날의 기분에 따라 안주와 술을 준비합니다. (혹은 안주 없이 깡으로) 남자 친구는 보통 떡볶이나 순대에 소주를, 저는 구운 치즈나 피자에 와인입니다. 스카이프 영상통화로 무한 수다를 떨며 카메라에 잔을 부딪힙니다. '짠'
몇 번은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잠든 적도 있는데, 그때마다 새삼 거리가 느껴집니다.... 아무리 지구 반대편에서 '윤누리, 일어나!'라고 외쳐도 스카이프 영상으로는 상대방을 깨울 수 없죠.
무수히도 많이 오간 편지와 이메일, 서로를 생각하며 보낸 크고 작은 선물들. 외로운 순간을 버티도록 보내준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악들. 반년간 홀로 외로웠던 독일 생활을 버텨낸 버팀목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영상통화가 대중적이지도 않고, 화질도 좋지 않았던 그 옛날. 그래도 머리를 굴려 창의적으로 저와 데이트를 해준 (어딘가에서는 잘 살고 있을) 그이에게 무한한 감사를 올리며 다음 화는 다시 UN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공항에서 나를 안아주었던 그 온기를 아직 기억해.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샛노란 패딩에 얼룩졌던 눈물도.
· 인턴 나부랭이는 무슨 일을 할까? (3 - 자랑할만한 일 편 ; 직원 교육)
· 인턴십이 끝나고... 이제 뭐 먹고살지?
· 환경부 장관을 대상으로 소송을 걸다 (석유화학회사 근무기)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을 찾다
· 에필로그
(부록)
· UN 붙었다고 끝이 아니다. 출국 전 준비해야 할 A to Z (피곤 주의)
· 독일에서 둥지 틀기 - 완벽한 워라밸이란 이런 것?
윤누리
운동과 술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 석유화학회사를 때려치우고 와인 공부하다 스타트업에 정착했다. 2019년 한 해동안 1,200개 가 넘는 커뮤니티 이벤트를 개최했다. (자칭 이벤트 전문가) 창의성과 영감이 샘솟는 삶을 위해, 인생을 변화시킨 사람과 문장들을 수집 중이다.
(현) 패스트파이브 커뮤니티 크리에이터팀
(전) 독일 UNCCD(유엔사막화 방지기구) FCMI 팀
석유화학회사 환경안전경영팀
서울대학교 과학교육, 글로벌환경경영 전공
산림청 주관, 유네스코 - DMZ 지역 산림 생태 연구 인턴
한국장학재단 홍보 대사
4-H 동시통역사, 캐나다 파견 대표
서울대학교 아시아 연구소 1기 인턴 팀장
서울대학교 국제 협력본부 학생대사 이벤트 팀장
와인 21 객원 기자, 레뱅드매일, 파이니스트 와인 수입사 홍보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