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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 Jul 04. 2020

인턴 나부랭이가 UN에서 정직원 대상 강연을?

강연에서 시작된 짜릿한 일 폭탄 썰 (나 죽네...)

상사가 툭 던진 업무, 'UN 공식 문서를 인포그래픽으로 만들어라.' 영혼을 갈아 넣어 샘플을 만들어봤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뜨겁잖아? 사무총장에게 보고 드린 후 UN 공식 홈페이지와 국제회의장에 게시하게 되는데...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그런데 이제 직원 대상으로 인포그래픽 교육을 해달라고? 난 인턴인데?


당시 제작했던 인포그래픽




정보관리팀 Rita가 불쑥 제 사무실을 방문합니다. 시원시원하게 큰 키에 깊은 갈색 눈동자가 예쁜 그녀는 예의 그 야무진 말투로 제게 묻습니다. '직원들이 인포그래픽에 관심이 많아요. 인포그래픽이 왜 중요한지나, 실제로 어떻게 만드는지 등... 혹시 점심시간에 한 시간 정도 직원들 대상으로 강연해주실 수 있어요? 제가 간단한 샌드위치 같은걸 준비할게요.'

(갑자기 그렇게 훅 들어오시면 어떻게 하시나요? 깜빡이 켜고 들어와 주세요. 심장 멎을 뻔.)

3초 고민하고 대답합니다. 


당연히 하겠습니다. 제안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짧은 3초의 순간 동안 머릿속에는 백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내가 만든 UN 문서 인포그래픽은 흉내 내듯 그럴듯하게 만든 건데... 인포그래픽의 정의, 개념은 뭐지?

영어도 잘 못하는데 강의라니, 질문을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인턴이 강의하는데 누가 와서 듣겠어. 그 귀한 점심시간에. (제가 근무하던 독일 소재 UN 사막화방지기구는 건립 15년 이래 인턴이 강연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답한 것은 본능적으로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UN 직원을 대상으로 강의할 기회는 없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제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입니다.



한 달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공허하게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구글과 위키피디아에 'infographic'을 검색합니다.

보고 있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인포그래픽의 역사....?


(쉽지 않다..) 그리고  발표 준비를 하다가 새삼 깨달았는데, 발표 자료 자체도 '인포그래픽'입니다. (대표적으로 ppt가 있죠) 인포그래픽이 주제인데, '인포그래픽'인 발표자료가 구리면 안 되겠죠. 예쁘고 가독성 좋게 꾸며야 호소력 있는 발표가 되겠죠. 당시에 힙했던 프레지(Prezi)로 발표자료를 만듭니다.


[Rita가 직원에게 보낸 강연 초대장 일부 발췌]

 (이것만 봐도 UN 디자인이 얼마나 구린지 바로 알 수 있다...)


발표자료를 만들고, 스크립트를 짜고, 스크립트를 100번 이상 읽고 달달달 외웠습니다. 강연 며칠 전부터는 꿈에서도 발표를 했습니다. 전날은 너무 잠이 오지 않아 꼬박 밤을 새웠습니다.

오히려 발표 당일은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했습니다. '이 정도까지 준비했는데 망할 일은 없다.' 약간의 자기 합리화로 스스로를 위안하고 드디어 발표를 시작합니다. 30여 개의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최대한 버벅거리지 않게, 당황하지 않게.. 하도 연습을 많이 한 터라 카세트테이프 재생 버튼을 누르듯 말이 쏟아집니다. 솔직히 발표를 어떻게 끝냈는지 기억나진 않습니다. (쏟아지는 질문을 다 이해하지 못해서 애를 먹었던 것이 가장 기억나네요)

떨리지만 침착하게...


그 이후 (제 딴에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A팀 팀장에게 온 메일


팀장 : 강연 당시 단체로 외부 일정이 있어서 참석을 못했는데, 다른 직원들에게 들으니 엄청 유익했다고 하는데... 혹시 미안하지만 우리 팀을 위해서 앵콜로 강연해줄 수 없을까요?   


나 : 쌉가능 → 앵콜 강연 완료



갑자기 사무실로 찾아온 B팀 팀장


팀장 : 제가 지금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지도를 활용하여 쉽게 시계열 데이터를 구현하는 것인데... 감조차 오지 않아요. 혹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 : 응? 그... 그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한 번 고민해보겠습니다.


'각 국가별 데이터를 담은 시계열 지도를 구현해라.' 전체 국가를 UN 기준 6개 기준으로 분류하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국가별 상태를 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강연 때 너무 아는 척을 했나 봅니다. 머리를 싸잡고 샘플로 참고할만한 자료를 찾아보니 '유레카', 길은 어딘가 있지요. 'Statsilk'라는 이름의 무료 오픈 소스 툴을 우연히 발견합니다. 이는 엑셀로 데이터를 입력하고 함수를 걸면 플래시 기반의 지도가 만들어집니다. 만지다 보니 어떻게 하는지 조금 감이 옵니다. 그렇게 UN 지역구별, 국가별 데이터를 (나름) 플래시 형태의 인포그래픽으로 구현합니다. 

국가별, 시계열 별로 데이터를 시각화하다!!

무료 인포그래픽 툴이 꽤 많아서 깜짝 놀랐는데, 인턴 생활했던 당시가 7년 전임을 감안하면 지금은 더 좋은 툴이 많을 것입니다.



밥 사준다더니 본색을 드러낸 개발자


평소에 말도 그다지 섞어보지 않은 개발자 직원이 점심 제안을 합니다. (왠열?) 한 그릇 거하게 먹고 배를 두드리는데 그가 제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냅니다.


개발자 : 홈페이지를 개편할 건데 실험적으로 몇 개 페이지는 아예 디자인을 좀 고쳐보려고 해요. 이 중 'Best Practices' 탭을 누리님이 디자인해봐 주실 수 있어요?

나 : 전 코딩을 못하는데요? 이 홈페이지는 무슨 언어로 만든 거죠....?

개발자 : 전에 인포그래픽 초안을 ppt로 그렸다면서요? 그냥 그렇게라도 만들어보면 어때요?

나 : 아유, 한 번 해보겠습니다. (밥 한 끼 사주고 이러기? ㅎㅎ, 이럴 줄 알았으면 디자인을 전공할걸)


PPT로 허접하게 만들어본 홈페이지 디자인



어디서 점심을 먹어야 할지도 몰랐던 존재감 없는 첫 출근 날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입니다. 직원들은 오며 가며 제게 티타임을 요청하고, 끝나고 전시를 보러 가자거나 공연을 보자는 등 즐거운 러브콜을 보냅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업무에 있어 UN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았다는 나름의 자부심입니다. 불과 2달 전, 일이 없어서 하루 종일 '퇴근하면 뭐 해 먹을까'만 고민하며 네이버 레시피만 들여다봤던 시절. 정직원 대상으로 강연을 한 최초의 인턴이 된 이후, 없던 일도 계속 생기는 짜릿한 바쁜 나날 속. 저는 제 시간의 선장이 되어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 기깔나고 간지나게 살아야지.
누구보다 찬란하고 눈부시게.



Upcoming.. 목차


· 인턴십이 끝나고... 이제 뭐 먹고살지?

· 환경부 장관을 대상으로 소송을 걸다 (석유화학회사 근무기)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을 찾다

· 에필로그


(부록) 

· UN 붙었다고 끝이 아니다. 출국 전 준비해야 할 A to Z (피곤 주의)

· 독일에서 둥지 틀기 - 완벽한 워라밸이란 이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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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누리

운동과 술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 석유화학회사를 때려치우고 와인 공부하다 스타트업에 정착했다. 2019년 한 해동안 1,200개 가 넘는 커뮤니티 이벤트를 개최했다. (자칭 이벤트 전문가) 창의성과 영감이 샘솟는 삶을 위해, 인생을 변화시킨 사람과 문장들을 수집 중이다. 


(현) 패스트파이브 커뮤니티 크리에이터팀

(전) 독일 UNCCD(유엔사막화 방지기구) FCMI 팀

석유화학회사 환경안전경영팀

서울대학교 과학교육, 글로벌환경경영 전공

산림청 주관, 유네스코 - DMZ 지역 산림 생태 연구 인턴

한국장학재단 홍보 대사

4-H 동시통역사, 캐나다 파견 대표

서울대학교 아시아 연구소 1기 인턴 팀장

서울대학교 국제 협력본부 학생대사 이벤트 팀장

와인 21 객원 기자, 레뱅드매일, 파이니스트 와인 수입사 홍보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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