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제주 여행기
2020년 유일한 여행이었다. 코로나가 심각해지기 전 11월 말에 다녀온 게 신의 한 수였다. 여행에서 다녀오자마자 정신없는 일상을 보냈다. 2개월이 지났지만 바다가 보이는 카페의 아늑한 소파,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맛났던 음식, 훼손되지 않은 성스러움으로 가득한 거문오름, 함께 방을 사용한 언니의 코 고는 소리까지 가끔 떠오른다. 쉴 틈 없이 빼곡한 나의 일과 삶에 쉼표를 찍었다.
네 며느리들이 반란을 일으켜 2019년 추석에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게 시작이었다. 일 년에 서너 번은 제주도에 오자고 했건만, 결국 그 멤버 중 사려니(사려 깊은 언니)와 함께 급하게 여행 일정을 잡았다. MBTI의 J유형인 나는 엑셀 가득 여행 일정을 스스로 잡아야 마음이 편하지만, 휴식을 위한 여행이었기에 모든 걸 사려니께 맡겼다. 문우가 알려준 김영갑 갤러리만 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려니는 철저한 사전 조사와 함께 거문오름 예약까지 완료했다.
올레길이 그렇게 좋은지 몰랐다. 탁 트인 제주도 길의 매력에 푹 빠져 첫날 3만 보를 걷고 말았다. 우도 선착장까지 걸어갔고, 우도 안에서는 올레길을 걸어 다니며 바다의 풍광을 즐겼다. 저녁에 고등어회를 먹겠다는 일념으로 식당까지 걸어갔으니. 사려니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평소 산행으로 단련된 사려니도 많이 힘들었나 보다. 나도 평소 만보 내외로 걷는 편인데 사려니만 아니었다면 더 걸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다음 날 아침에 너무 무리했다는 약간의 후회가 몰려오긴 했다.
둘째 날은 무리를 하지 않기도 결심하고 2만 보만 걸었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거문오름은 예약한 사람만 관람이 가능하며 자연유산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동행 탐방해야 한다. 사려니 덕분에 편하게 여행한다는 감사한 마음으로 택시를 타고 거문오름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사려니가 실수로 다음 날짜로 예약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실망감이 몰려왔다. 사려니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거문오름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었다. 다음 날은 공항으로 이동해야 하는 날이라 거문오름을 다시 오기는 어려울 테니.
매표소 담당자는 원칙을 고수했다. 아침 이른 시간으로 예약했기에 마감은 되지 않았지만 예약은 하루 전에 해야 한단다. 사정해도 안 될 것 같기에 포기하고 시티투어나 해야겠다 마음먹고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상황이 반전되었다. 사려 깊은 언니는 성격도 좋아 그사이 자연유산해설사와 친해져서 당일 발권이라는 전례 없는 행운을 만들었다. 헛걸음하지 않게 되었고, 덕분에 화산분화구, 협곡, 수직 동굴 입구를 보는 호사를 누렸다. 제주만의 독특한 용암 지형을 만든 소중한 시작점이라니 부디 이곳이 계속 잘 보존되기를.
거문오름이 생각보다 힘들지 않고 짧은 코스였기에 오후에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미술관으로 이동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소개해준 문우가 사랑스럽게 여겨질 정도였다. 아무리 외진 곳에 있어도 보러올 사람은 온다고 작가는 영상에서 말했는데 역시나 멀리 있어도 관광객이 알음알음 찾아왔다. 입장권으로 작가의 사진이 담긴 엽서를 주는 센스라니. 내부 갤러리뿐 아니라 아기자기한 정원의 매력에 빠져 계속 사진을 찍었다.
20년 동안 제주도만 사진에 담은 작가의 열정과 루게릭병으로 투병하다 자신이 직접 만든 두모악에 잠들었다는 찡한 스토리까지. 멋진 정원은 그가 투병 생활을 하며 손수 일군 것이다.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빠져 치열하게 살다간 예술가가 부럽기까지 했다. 불치병으로 떠났지만 그는 행복한 끝맺음을 맞이했으리라.
마지막 날은 저녁 비행기로 서울에 와야 했기에 만 보만 걸었다. 갈수록 줄어드는 운동량이다. 부담 없는 일정을 위해 비자림으로 향했다. 평대리 비자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374호로 지정되었다. 작년에 비자림에 오려다 입장하는 차량 행렬이 너무 길어 포기했던 곳이다. 다시 도전하길 잘했다.
이른 아침이어서였을까? 삼나무로 가득한 사려니 숲이 대중적이라면 비자림은 고요하고 신비로웠다. 500년 이상 된 비자나무 2,800여 본이 원시림에 가깝게 자생하고 있다. 그리 넓지 않아 동네 정원 한 바퀴 도는 기분이랄까? 다시 제주도에 방문한다면 근처에서 숙박하며 아침마다 산책하고 싶은 곳이다. 자연 그 자체였다.
오후에는 요즘 힙하다는 월정리로 향했다. 서울로 가야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바다를 실컷 보고 카페도 두 곳이나 갔다. 예전 같으면 여행지를 최대한 즐기려고 하루에 일정을 몇 개씩 잡아 시간을 알뜰하게 보냈지만 나에겐 멈춤이 필요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대화없이 생각에 잠겼다. 잠시 낮잠도 즐겼다.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쉬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이번 여행을 위해 회사에 휴가도 냈고 개인 일정도 모두 중단했다. 감사하게도 사흘 내내 날씨가 화창했다. 제주의 가을은 특별했다. 단풍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11월에도 여전히 초록으로 가득했다. 추울 거라 걱정했지만 이동하기에 적합했다. 제주는 일 년을 정신없이 달릴 나를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었다. 따뜻하게 나를 안으며 다독거렸다.
"잘했어. 잘하고 있어. 실컷 몸과 마음에 담으렴. 지치거나 힘들 때 나를 떠올리면 힘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