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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아들래미

「희극의 파편」46. 안톤 체홉 - 기쁨 中

by 재준

엄마


(하품하며) 벌써 열두 시네요! 잡시다!



아빠


(기지개를 켜며) 마누라, 어제, 하마터면 망루에서 술 취한 군인이 떨어질 뻔했어. 난간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데, 알겠어? 그만 난간이 부서져버렸지 뭐야! 다행스럽게도, 그때 그 사람 부인이 점심을 가져다주려고 망루에 갔다가 그의 소매 자락을 겨우 잡았다더군. 아마 아내가 아니었다면, 그는 그냥 떨어졌을 거야, 고약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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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래요, 여보, 참 기가 막한 일이에요.




아들이 행복해하며 등장한다.



엄마


왜 그러니? 어디서 오는 길이니?



아들


기뻐서 그래요, 어머니! 이제 전 러시아가 저를 안다고요! 모두가요! 전에는 단지 부모님만 이 세상에 14등관 드미트리 쿨다로프(자기 자신)가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제는 전 러시아가 저에 대해 안다고요!



엄마


그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봐!



아들


짐승처럼 사시네요, 신문도 안 읽으시고.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사유해보는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 마흔여섯 번째 작품은 안톤 체홉의 '기쁨'입니다.

<수요일에는 체홉 작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체홉작품 모음 1 , 2 , 3 , 4 , 5 , 6 , 7 , 8 , 9 >


간단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신문에 술 취한 군인이 난간에서 떨어질 뻔하다가 구조됐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 아버지가 그 뉴스를 새삼스럽게 읽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아들이 신문에 자기 이름이 실렸다며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아빠


뭐라고? 어디에? (창백해져) 쟤 미친 거 아니야?



엄마


(성상에 성호를 그으며) 예수님! 우리의 죄를...



아들


(자랑스럽게) 그래요! 저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고요! 지금 저에 대해 전 러시아가 안다고요! 어머니, 오늘 날짜 신문을 꼭 기억해두세요! 앞으로 가끔 읽자고요. 보세요! (주머니에서 신문을 꺼내어 아버지에게 건넨 후 파란색 연필로 표시한 부분을 가리킨다.) 읽으세요!



아버지가 안경을 쓰고 기사 내용을 확인한다.


엄마


(다시 성상을 바라보며 성호를 긋고 속삭인다.) 성모님...



아빠


음... 12월 29일 저녁 11시. 14등관 드미트리 쿨다로프가...



아들


(말을 가로막으며) 보셨죠, 보셨죠? 계속하세요!



아빠


(계속 읽는다.) 14등관 드미트리 쿨다로프가, 술집에서 나와 말라야 브론나야 거리에 위치한 코지힌 씨 저택에서 술에 취한 채...



아들


(재빨리) 저는 시몬 페트로비치와 함께 있었죠... 모든 것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요! 계속하세요! 더요! 더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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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술에 취한 채 미끄러져 그곳에 서 있던 마부의 말 앞에 떨어져...



엄마


오, 아버지!



아빠


두르킨 영지에 사는 시골 농부 이반 드로토프의 말에 따르면, 놀란 말이 쿨다로프를 타 넘고 제 2길드에 소속된 모스크바 상인 스테판로코보이를 태운 마차를 끌고 거리를 질주하다가 근위병들에게 체포되었다. 쿨다로프는 처음에는 실신 상태에 있다가, 경찰서로 넘겨져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그의 뒤통수에 가해진 충격은...



엄마


(울기 시작한다.) 내 심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느껴질 정도로 쿵쾅거려!



아빠


... 그의 뒤통수에 가해진 충격은 경미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발생한 사건에 관해서는 조서가 작성되었다. 피해자에게는 의료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엄마


이런 슬픔이!



아들


뒤통수를 찬 물로 적시라고 했어요. 이제 다 읽으셨죠? 네? 보세요! 이제 전 러시아에 기사가 나갔다고요! 이리 주세요! (신문을 받아 쥐고는 접어서 주머니에 넣는다.) 마카로프에게 가서 보여줄 거예요... 도 이바니츠키에게도 보여줘야 하고, 나탈리아 이바노브나와, 아니 심 바실리예비치에게도... 자, 갑니다. 그럼 계세요! (휘장이 달린 챙 모자를 쓰고 장엄하게, 그리고 기쁨에 넘쳐 거리로 뛰어나간다,)



부모님은 얼어붙은 듯, 미동도 없이 그의 뒤를 바라본다.



어떤가요?


내용은 되게 가볍고 우스워보이지만.. 체홉 작품이 그러하듯, 내용을 곱씹어보면 꽤 슬픈 내용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 아들은 술에 취했어야 했으며, 왜 엄마는 울기 시작했으며, 아빠는 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신문만을 읽어야만 했을까요?..

제가 너무 확대해석을 한 걸까요?ㅎㅎ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1. 슬픔은 언제 찾아오는 것일까요? 아버지의 무심한 태도가 장면을 더 슬프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2. 갑작스러운 현실이 내 무심한 마음과 충돌하는 느낌이 든 적이 있나요?


3. 아들은 왜 자랑스러워 하는 걸까요? 그것은 일종의 자존감의 방어기제일까요?


4. 뻔뻔한 것과 미련한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5. 결국 무엇이 중요한가요? 내 글은 결국 어떻게 결말을 짓게 되나요? 내 글에서 모순된 것은 무엇인가요?


6.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하는 그 태도 자체가 모순일까요?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지금 나는 비밀이 없지만 말할 수 있다면 할 수도 있어,

지금 나는 말할 수 있지만 거짓말 한다면 할 수도 있어,

그래도 말할테야 참을 수가 없어 별것은 없어도 원하는 건 많아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요 아름다운 꽃을 꺾고 자꾸만 보고 싶네.

아아, 좋아좋아, 개판이다, 에라 모르겠다, 제정신들이 아니야.



-이박사



오늘의 고사입니다.





견월망지(見月忘指)

달을 보되, 손가락은 잊어라

본질이나 핵심을 놓치고 주변적인 것에 매달리는 어리석음





뻔뻔해야하는데,나는손가락같은 슬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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