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처음 얼마 동안은 손님이 없었다. 하루에 두 세명의 손님이 전부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커플 같아 보이는 젊은 남녀의 방문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슷한 시간에 방문 예약을 했고 서로를 대화상대로 지목했다. 그렇게 방문한 남녀는 반가면을 쓴 채 서로의 손을 잡고 들어오거나 대화를 하며 들어와 같이 앉았다. 때로는 심각했고 때로는 웃음소리가 나기도 했다. 손님들은 점점 많아졌고 개업 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영업시간 내내 테이블 모두 방문 예약 손님들로 꽉 차기 시작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했다. 카페를 나가는 커플로 보이는 손님을 붙잡고 물었다.
“저 손님 혹시 어떻게 오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네?” 남자가 조금 당황한 듯 반문했다.
“갑자기 커플 손님들이 많아져서요”
“아~ 인스타 소개글 보고 왔어요. 요즘 마나카 유명하거든요.”
“마나카요?”
“마음을 나누는 카페요”
“아, 인터넷에 소개가 됐군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나는 자리로 가서 카페가 소개된 인스타를 검색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남자 친구와 전 며칠 전 크게 싸웠어요. 남자 친구가 왜 그리 화가 났는지 몰랐죠. 제가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오빠랑 드디어 사귀게 돼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렇게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헤어지는 건 아닌지 무서웠어요. 어느 날 남자 친구가 할 말이 있다고 하더군요. 만나서 아무 말 없이 조금 걷다 보니 ‘마음을 나누는 카페’란 곳이 보였어요. 이름에 끌려 들어갔더니 예약제로 운영되는 곳이라며 카페 이용 안내문을 주더군요. 남자 친구와 저는 회원가입을 하고 바로 다음 시간을 예약해서 들어갔죠. 음료를 시키고, 가면을 쓴 채 서로를 바라봤죠. 한 동안 아무 말 안 하던 남자 친구가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화난 이유를 말하기 시작하더군요. 저희는 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나 사귀게 되었는데, 제가 동아리에서 친한 오빠와 대화하는 게 어느 순간부터 질투가 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괜히 신경질도 내고 그랬다고.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남자 친구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어요. 그동안 맘 고생했을 남자 친구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말을 하다 보니 어느새 둘이 웃고 있더라고요. 혹시라도 사귀는 사람과 조금은 색다르게 진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으신 분들은 마나카를 가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카페의 주요 고객이 젊은 커플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지금의 이 상황이 신기하기만 했다.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내 계획대로 흘러갔던 일은 많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사람을 구하는 의사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때도 있지만 결국 점수에 맞춰 대학과 과를 선택했다. 대기업에 취업할 줄 알았지만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입사해서는 누구보다 빨리 임원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입사 동기 중 가장 먼저 회사를 그만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카페는 예전의 경험과 다르게 생각보다 잘 되고 있었다. 영업이 끝난 후 마우스 휠을 빠르게 돌려가며 다음 날 방문자를 확인했다.
닉네임: 무인76, 방문시간 12월 31일 18:00~19:00, 역할: 말하는 사람, 좌석번호: 6-1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이던 마우스 커서가 멈췄고 심장은 마구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진정하기 위해 큰 숨을 내쉬어도 소용없었다. 무인76. 복어 독이 든 초밥을 손님에게 주려했던 그 남자였다. 가게가 망했나? 절망에 빠져 갑자기 다른 사람들을 해코지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그를 다른 손님과 맺어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별도리 없이 그의 상대 역할을 하기로 했다. 다음 날, 나는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가면을 쓴 그가 들어왔다. 그는 잠시 두리번거리다 테이블로 다가와 내 앞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그는 자리에 앉으며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나는 목소리에 긴장이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했다.
“카페가 개업하고 첫 손님으로 왔었는데, 그때와는 많이 변했네요. 손님들이 무척 많아졌어요” 신기한 지 주변을 둘러보며 남자가 말했다.
“젊은 손님들이 많네요” 그는 덧 붙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제 풀에 지쳐 빨리 자리를 떠나 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저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요” 그는 자연스레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자신의 직업을 말하지 않았다. 첫 방문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무척 사랑하는 일이었고 자부심도 있었죠.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난 뒤부터는 도저히 제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처음에는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는 앞에 놓인 잔을 응시한 채 말을 이어갔다.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저는 그 사건 때문에 제가 사랑하는 일을 영영 못하게 될 것 같은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죠. 이 끔찍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일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 외에는 없는 듯했어요. 참 이상하죠? 하고 있는 일을 못하게 될 것 같은 무서움에 그 일을 스스로 포기한다는 게. 하지만 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그는 잠시 멈추고 내 말이 이해가 되냐는 듯 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의 말을 잘 듣고 있음을 표현했다. 남자의 눈길은 다시 잔을 향했다.
“불안은 마치 계속 피어오르는 연기 같아요. 연기는 팔다리를 아무리 휘둘러도 잠시 흩어질 뿐이잖아요? 불안도 사라진 것 같다가도 금방 또 다른 불안이 그 자리를 다시 채워나가죠. 발목이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발버둥 쳐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올무에 걸린 동물처럼 하루 종일 어떤 생각에 얽매여 지내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 할 것이에요.” 그는 읊조리듯 말했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그의 말은 날카로운 도끼가 되어 굳어진 나의 가슴을 한 순간에 찍어 냈고 그 찰나, 나는 그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아마도 그의 고통과 답답함은 골을 쪼개 뇌를 헤집고 싶어 했던 내 심정과 비슷할 테다. 불안이 비논리적 사고의 결과라는 것을 알면서도 괴로워하는 이유는 이성이 감정 앞에서 때때로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꿈인 줄 알면서도 무서움에 진저리 치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일도 당신이 생각한 그대로 일어나지 않아요. 불확실한 미래로 현재의 자신을 학대하지 않았으면 해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던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나는 그에게 불쑥 말했다.
그는 놀란 듯 나를 다시 쳐다봤다.
“맞아요. 정말 미련한 짓이죠. 하루에도 몇 번씩 괜찮을 거라 되뇌었죠.....”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이내 말을 이었다.
“그거 아세요? 불안할 때 괜찮을 거라 스스로 다짐하면 꽤 효과가 좋아요. 그런데 이제는... 내성이 생겼나 봐요” 그의 낮은 목소리가 너무 슬프게 들렸다.
“이만 가야겠어요.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는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가 나가자마자 그의 회원 정보를 살펴봤다. 무인스시. 종로에 있는 그의 일터가 직장란에 또렷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