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나누는 카페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어?” 아내가 맥주 한 캔을 가지고 와 내 옆에 앉으며 물었다.
아마도 며칠 전 그 일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글쎄, 어떻게 생각해?” 아내에게 되물었다.“음... 솔직히 말하면 걱정스럽지. 지금 직장은 안정적이잖아. 당신이 말한 ‘마음을 나누는 카페’는...” 아내는 말꼬리를 흐렸다.
“누구나 말하기 힘든 불안이나 고민이 있잖아”
“자기는 그런 게 있어?” 아내가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네” 거짓말이었다.
불안은 어떤 합리적 판단도 없이 순식간에 찾아들곤 했는데 마치 풀칠한 종이처럼 나의 뇌에 한번 들러붙으면 떼려야 뗄 수 없게 된다. 나의 뇌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불안 때문에, 두개골을 쪼개고 뇌를 헤집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때도 있었다.
“거봐, 자기도 대답 못 하잖아. 게다가 그런 비밀이 있어도 남한테 얘기하는 건 쉽지 않을걸?”
“익명성이 보장되면 속마음을 조금은 편안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아내에게 ‘마음을 나누는 카페’에 대해 설명했다.
“자, 손님들은 일단 드레스룸에 들러 준비된 가면을 써야 카페에 들어올 수 있어. 원하면 간단히 옷도 갈아입을 수 있고. 카페에는 2인용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데, 두 개의 의자 중 하나는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표지가 붙은 파란색 의자고 다른 하나는 ‘말하는 사람’ 표지가 있는 빨간색 의자야. 손님들은 자신이 정한 역할에 따라 파란색이나 빨간색 의자에 앉아 대화를 시작하고. 물론 대화를 하면서 역할은 언제든 바뀔 수 있지. 커피나 와인, 맥주 등 간단히 마실 것만 준비하려고. 따로 안주는 안 팔 거야. 술 마시는 곳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곳이니깐.”
“그래도 낯선 사람의 얘기를 듣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겁나기도 하고.” 아내는 단정 짓듯 말했다.
“그래. 고민해 보자. 급할 건 없으니깐”
회사는 여느 때와 같았다. 나는 자리에 앉아 뉴스를 검색했다. 사회 부적응자를 다룬 기사를 읽다 뜬금없이 내가 회사 부적응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시선에 병적일 정도로 집착했으며 남들이 나를 인정해 주기 바라는 욕구가 그 누구보다 강했다. 바쁜 부모, 애정결핍, 분리불안. 돌이켜보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내 과거의 이야깃거리들을 꽤 찾을 수 있다.
나의 이런 성향은 어떤 일이든 실수 없이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졌다. 상사의 스쳐 지나가는 표정과 한마디 말에도 수십 가지의 의미를 부여하며 눈치를 봤으며 사소한 실수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칠 것 같은 느낌에 늘 불안했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모두 내 책임인 것 같아 괴로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정신은 지치고 쇠약해져 갔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모래성 허물기 놀이를 종종 했었다. 먼저 모래성을 쌓고 그 위에 깃발을 꽂아놓는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모래를 가져갈 순서를 정한 다음 깃발을 쓰러뜨리지 않도록 조심히 모래를 퍼오는 것이다. 순번이 돌아갈수록 깃발은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다 결국 힘없이 모로 넘어지고 마는데, 그 순간 놀이는 끝난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과정도 이와 비슷했다. 늦은 오후, 나는 팀장과 의견 차이로 꽤 심하게 다투었다. 마지막 모래를 팀장이 퍼간 듯했다. 드디어 모래성 위 깃발이 고꾸라지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회사 그만두려고” 저녁을 먹으며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나를 쳐다봤다. 그리 놀란 얼굴은 아닌 듯 보였다.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젊을 때 내 사업을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회사에서 임원이 되는 것은 힘들고 기껏해야 팀장인데... 그렇다고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잖아. 둘째를 가지려면 지금 보다 더 많이 벌어야 하고. 게다가 요즘은 회사 분위기도 많이 달라져서 정년까지 다닐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고.” 나는 퇴사에 대해 오랜 시간 깊이 생각했다는 인상을 주기를 바라며 거침없이 말했다.
“처음엔 좀 힘들겠지만 일 년이면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지금 버는 것보다 수입도 많아질 테고 집 산다고 빌렸던 은행돈도 더 빨리 갚고.....자기도 육아로 많이 힘들었잖아. 내 일을 하면 출퇴근이 자유로우니 집안일도 더 많이 도와줄 수 있고 아이랑 놀아주는 시간도 많아지고” 나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아 변명을 계속했다.
아내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고민 많이 한 거 알아. 관두는 것에 대해 자주 말하기도 했으니까. 나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했었는데 그때가 생각보다 일찍 온 것 같아 당황스럽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하네.”
아내는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래, 오빠 하고 싶은 대로 해... 믿을게”
막상 아내가 동의하자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더럭 겁이 났다.
“정말 괜찮아?” 스스로 결정하기 두려워 그 답을 아내에게 구하는 것 같았다.
“오빠를 믿어” 아내는 다시 한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