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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피파 Jul 19. 2016

#2_'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그럼

괜찮아, 괜찮을 거야


士내女내 #2_'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그럼     


사.내.연.애.


매정하게시리,

겨우 이 네 글자에 마침표를 왜 네 개씩이나 찍었느냐고?

누가 내게 이렇게 물어온다면,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할 수 있다.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고.

마음속으론 그놈의 잊혀질 권리를 무한 번 외쳐대도,

이전 직장에서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엔

공식처럼 각인되어 있다.


나란 놈(이대리) = 사내연애 한 놈 = 결국 사내연애 실패로 떠난 놈


그렇다. 일과 사랑을 동시에 쟁취하고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며 옆팀 승희 씨와 연애를 시작해버린 나.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던 나에겐

이별의 뒷감당을 잘할 수 있겠냐 말리던 선배의 말도

들키는 순간부터 삽시간에 퍼질 루머와 뒷담화가 걱정되지 않느냐는 동기의 말도

단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들렸던 건 그녀의 웃음소리뿐.


미쳤다. 정말 나는 사내연애 일 년이 채 안되어 이별하고 말았다.

우려 섞인 목소리로 나를 말리던 동료들의 말은 현실이 되었고

그 현실은 넥타이처럼 내 목을 바싹 죄여 오기 시작했다.

연애 중 들려왔던 질투 섞인 말들은

'그래, 내가 행복한 사람이니 너네들은 실컷 부러워해라'

하며 가소롭게 넘길 수 있었는데...


"어휴, 이제 승희 씨 어떡해. 첫 직장에 입사하자마자 연애 시작하더니 참 안됐네."

"뭐 때문에 헤어졌을까? 우리 내기할래?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을지?"  

이별 후 들려왔던 이런 이야기들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안 그래도 아픈 내 맘을 세차게 후벼 팠다.

무슨 내 연애사가 사내 엔터테인먼트라도 된다는 말인가.

에휴, 사내 전용 포털사이트가 있었다면

연일 실시간 검색어 일 순위는 내 연애사가 되었겠지...   


"오빠, 우리 잠깐 얘기 좀 해."

얼음보다 차가웠던 그녀의 목소리는 재회를 바라지 않았다.

"나 이대로는 더 이상 여기 회사에 못 다니겠어.

오빠가 사라져주던지 아니면 내가 나가던지.

우리 어떻게 해서라도 눈앞에서 멀어지자.

우연이라도 마주치기 싫어..."

오히려 멀어진 마음처럼 몸도 더 멀어지길 바랬다.


"그 그래. 내가 나갈게.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한창 적응 중이었던 너에게 먼저 다가갔던 것도

나였고 들키지 않게 더 조심했었어야 했는데 다 내 실수였으니까.

미안해, 앞으로 너한테 피해 안 가도록

나 여기 친한 분들한테만이라도 잘 얘기하고 떠날게."


도망치듯 뛰쳐나온 전 직장을 뒤로하고

또 마주한 반가운 듯 반갑지 않은 수개월의 백수생활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새로운 직장에 입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로 새로 입사한 이규민 대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내.연.애는 하지 않겠습니다!)"


내 마음속 하나의 공식을 세웠다.


이 회사 여자들 = 모두 내 직장동료들 = 우리는 좋은 친구!


오늘도 기도문 외우듯 공식을 되새기며 밟는 퇴근길.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어디에선가 많이 봤던 뒷모습이 앞에 있다.


다소 높아 보이는 굽의 검정 하이힐

적당히 단정해 보이는 검은색 치마와 흰색 블라우스

다른 점이라고는 단지 낮에는 질끈 묶여있던 긴 머리가

지금 밤에는 풀려있던 것뿐,

옆팀 여자 직원이 맞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표정 변화 없이 인사 한 그녀의 차가운 첫인상과는 달리

눈 앞의 그녀는 따뜻해 보였다.

누구나 지치고 힘들 퇴근 시간대.

앞사람이 실수로 떨어트린 지갑도 손수 허리 굽혀 주워

미소와 함께 지갑을 건네었고

내 앞 앞자리에 앉아 냈던 통화 목소리는

누군가를 위로하는 듯 다정해 보였다.


우연의 장난일까. 그녀가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내리려 한다.

마치 내 속마음을 모두 들켜버린 것처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을 땐,

나도 몰래 시선을 돌렸고 이날만큼은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기로 했다.


조금 더 멀리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동안

그녀가 자꾸 눈에 밟힌다.

그 뭐였더라...

내가 입사하며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던 그 공식...

그녀의 뾰족한 굽에 밟혀버렸나.

그날은 잠이 드는 순간마저도 그녀가 떠올랐다.


뭔가에 홀린 듯

복도로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밟고 있는 날 발견했고,

그땐 이미 늦어버렸다.


결국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 던져버리고 말았다.


"유미 씨, 오늘 입으신 옷이 참 예쁘네요.

퇴근하고 어디 약속 있으신가 봐요?"

'난 또 왜 이럴까? 괜찮아, 사랑이야... ㅠㅠ'

  


본 게재 글은 아낌없이 피드백을 보내주시는 애독자 중 한분의 추가연재 요청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본 에피소드는 연재를 진행 중인 로맨스 소설 '士내女내'의 두 번째 에피소드 입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


1편 - #1_'하다'는 것

2편 - #2_'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그럼   

3편 - #3_오작동! 내 이성적 사고회로

4편 - #4_그 한마디가 나오기까지...

5편 - #5_설레임,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6편 - #6_넌, 이런 내 맘 알까?

7편 - #7_너라는 우주에 첫걸음

8편 - #8_시나브로 길들여지기

9편 - #9_보통남자? 보통이 아닌 듯

10편 - #10_보통여자? 내게는 다른 걸

11편 - #11_이 밤의 끝자락

12편 - #12_갈피와 타이밍

13편 - #13_참 묘한 '첫 통화'


- 퍼피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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