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퍼피파 Aug 19. 2016

#4_그 한마디가 나오기까지...

화려하지 않은 그 한마디, 단 그녀이기 때문에


士내女내 #4_그 한마디가 나오기까지...


그 한마디가 나오기까지

참 많은 시간을 썼고 긴 고뇌의 길을 돌아왔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쉽게 달고 사는 

평범한 한마디.

여태껏 살아오며 많은 사람들에게 건네 왔던

그 한마디.

그 한마디를 내뱉기 힘들었던 이유는 

그 누군가가 아닌 '그녀'였기 때문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왜 또 난 그토록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사내연애에 빠지려 하는가.

그녀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내 마음 또한 덜어내고 싶은데,

매일 아침과 저녁, 그녀와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목적지를 향하게 된 운명의 장난은

자꾸 내 등을 떠밀어 그녀에게로 내몬다.  


"저 유미 씨, 우리 사는 동네도 비슷하고,

타는 버스도 같은데, 옆자리 앉아서 같이 갈래요?"


정말 이 말을 처음 꺼내게 된 것은 거짓말 1도 안 보태고

단지 이 말을 꺼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처음 몇 번은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나

우리가 이웃 주민임을 들키지 않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하루는 퇴근시간이 겹쳐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나란히 회사건물 밖을 걸어 나왔는데, 

민망함에 먼저 그녀를 앞질러 버스를 타러 뛰어갔다가

결국 버스를 기다리던 내게 다가오는 그녀를 마주하고 말았다.


"오, 유미 씨도 이 버스 타세요? 어느 정류장에서 내리세요?"


하.. 난 아무것도 몰라요 모른 체하며

뻔뻔해지기란 쉽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에 함께 버스를 기다린 적이 있었고

심지어 같이 버스를 탔었다는 것을.


우린 서로 같은 팀이 아니기에 오랜대화를 이어갔던 적이 없었던 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자꾸만 생겨나는 뻘쭘한 여백을 채워 넣느라 

난 쓰잘데 없는 이야깃거리들을 두서없이 꺼내었다.

마치 첫 만남이 어색한 소개팅남처럼 말이다.


"유미 씨, 회사는 어떤 거 같아요? 일은 할만해요?

일하면서 종종 옆 팀분들 목소리 들리던데,

팀에 되게 무서우신 상사 있지 않아요?

목소리 되게 걸걸하고 허스키한 여자분 계시던데."


공공의 적을 만들면 내부의 결속은 보다 단단해지는 법.

우리들 사이 얼음 같은 장벽을 깨기 위해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 같은 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그녀의 편이 되어 하나둘씩 공감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 사이엔 웃음과 미소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정신없이 떠들다 보니 시간은 마구 흘러갔고

버스는 결국 눈앞에 도착해있었다.

때마침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고민들.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나름 화기애애 졌는데

버스 안에서 갑자기 나몰라라 하며 따로 앉는 것도 웃기겠지?

그래도 제대로 이야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고 또

옆에 앉게 되면 가는 동안 계속 신경 쓰일 텐데 어쩌지...

에라 모르겠다, 우선 내뱉어나 보자."


결국, 난 그녀에게 우리가 같은 이웃주민이며 같은 버스를 탄다는

우연 같은 사실을 확인시킴과 동시에, 

옆자리에 같이 앉아 집까지 갈 것을 물어보고 말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옆자리에 앉아 서로가 가까워진 만큼

그녀를 향한 마음도 점점 사실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는 게.

그녀가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방 안과 주말에서도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순간마저도

한유미, 그녀가 자꾸 생각난다.


결국 난, 가끔씩 그녀와 함께 밟는 퇴근길 이외에도

매일 기계처럼 일어나 발을 들여놓고 빠지는 회사 이외에도

꿀맛 같은 주말의 분위기가 좋은 식당에서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졌다.


'유미 씨 이번 주말에 뭐하세요?

유미 씨는 보통 주말이면 뭐해요?

유미 씨 주말에는 일 안 하시죠?'


나 참, 밥 한번 같이 먹자 물어보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야, 밥 한번 먹자. 이번 주말 어때?

주말에 뭐하냐? 밥 묵을래?"


편한 여자 사람 친구들부터 남자 사내 친구들에겐 그저 편하게 내뱉던 한마디.

수많은 질문 후보들을 가려내고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최적의 경로를 물색한다.


아름다운 순화작업이 필요해서인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엔 내 담력이 모자라기에

탁자 위에 보이는 귤 몇 개를 챙겨 힘을 빌리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밝아온 점심시간 직후.

때마침 그녀 홀로 탕비실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미 씨,  점심 맛있게 먹었어요?

제가 집에서 귤 가져왔는데 되게 맛있어요.

같이 먹을래요?"


끄흑... 그녀가 싫댄다. 

같이 밥 먹자는 데이트 신청에 대한 거절도 아닌데,

귤 먹기 싫다는 거절이 너랑은 밥조차 같이 먹기 싫단 말로 들린다.

냉정하게 등을 돌리는 그녀에 난 망했다 하며 고개를 푹 숙이려는 순간,

들려오는 한 마디와 예쁜미소.


"저기요, 그래도 물어봐줘서 고마워요 ^-^"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반전 매력이란 이런 게지.

표정 변화 없이 차갑게 귤을 거절했던 그녀가

환한 미소와 함께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한번만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지옥행 티켓인 줄 알았던 귤이 천국행 티켓일줄이야...크킄


오늘만큼은 내 퇴근시간을 그녀의 퇴근시간에 맞춘다.

언제 즈음 퇴근할지 따로 물어보진 않았지만

난 칼퇴해도 될 만큼 모든 일을 다 해치워 버린 채,

흘깃 그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난 오늘 그녀와 함께 버스를 같이 타야 하니까.

같이 버스를 타서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당당히 한마디 하련다.


"유미 씨,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요? 저랑 같이 밥 먹을래요?"




본 에피소드는 한창 연재를 진행 중인 로맨스 소설 '士내女내'의 네 번째 이야기입니다.  아래는 이전 에피소드 목록이며, 전편을 읽어보지 않은 분들은 차례대로 읽어보면 재밌을 듯싶습니다.


1편 - #1_'하다'는 것

2편 - #2_'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그럼

3편 - #3_오작동! 내 이성적 사고회로

4편 - #4_그 한마디가 나오기까지...

5편 - #5_설레임,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6편 - #6_넌, 이런 내 맘 알까?

7편 - #7_너라는 우주에 첫걸음

8편 - #8_시나브로 길들여지기

9편 - #9_보통남자? 보통이 아닌 듯

10편 - #10_보통여자? 내게는 다른 걸

11편 - #11_이 밤의 끝자락

12편 - #12_갈피와 타이밍

13편 - #13_참 묘한 '첫 통화'


- 퍼피파 -



士내女내
https://brunch.co.kr/magazine/sanaeyeonae

퍼피파의 브런치

https://brunch.co.kr/@puppypaw

보미의 봄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bichonfrise_bomi/   

보미의 봄이야기

https://brunch.co.kr/magazine/bichonfrisebomi

이전 03화 #3_오작동! 내 이성적 사고회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