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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피파 Aug 31. 2016

#5_설레임,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설레임의 다른 말은 거울


출처: 영화 '몽상가들' 스틸컷


士내女내 #5_설레임,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오늘따라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몰라도

거절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호의를 밀어내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계속 찝찝하고 불편하다.


귤을 같이 먹자며 미소를 건넸던 그를

거절로 고개 숙이게 했던 나.

이미 엎질러진 물에 내 애꿎은 높은 하이힐 굽을 한번 쳐다봤다.

무엇보다 제일 걱정되는 건,

오늘 이 순간부터 그가 나에게 단 한순간의 우연조차 허락지 않을 만큼

나를 피하지는 않을런지,

내가 그에게 여지를 남길 수 있는 기회를 허락지 않을 만큼

나를 차갑게 대하진 않을런지...


만약 그게 맞다면, 오늘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자리를 뜨지 않겠지? 나랑 같이 집에 가기 싫을 테니까.

만약 먼저 자리를 뜬다면, 쏜살같이 달려 나가 버스로 향하거나

조금은 돌아가더라도 다른 버스나 지하철 경로를 뚫어내겠지. 

머피의 법칙에 근거한 안 좋은 경우의 수들만 생각하다

일은 손에 안 잡히고 몇 번은 미어캣처럼 슬쩍 그의 자리를 흘겨본다.


그래, 내가 졌다. 역시 내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았어.

물론 오늘따라 야근할 거리가 생겨서

지금 이 시간까지 석고상처럼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지.

그렇다고 지금 시침이 11시를 넘어가는데도 갈 기미가 안 보인다는 건

아예 작정하고 나랑 가기 싫다는 거겠지.

풀썩, 나는 집에 가야겠다. 


"유미 씨, 이제 집에 가세요? 오늘은 일이 많았나 봐요?"


으응?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풀이 죽어 기다리는데

왠지 숨이 차 보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네, 오늘따라 일이 좀 많이 밀렸네요. 규민 씨도 일 많았어요?"


모르겠다, 그의 일이 딱 나와 같이 끝나게 된 건 우연인 건지 혹은 필연인 건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 해도 좋아.

다행히 그와 나는 다시 집에 같이 갈 수 있게 되었고, 

무덥던 열대야도 오늘따라 적당하게 느껴졌다. 


"유미 씨,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요? 저랑 같이 밥 먹을래요?"


하하호호, 며칠 전 퇴근길에 나누었던 오랜 대화처럼

막힘없이 시원한 질문과 답들로 서로를 더욱 깊이 알아갔다.

이제는 그의 호의를 거절할까 고민조차 하기 싫을 만큼 그가 무척 궁금해진 나.

때마침 회사가 아닌 밖에서, 나를 따로 만나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알았다.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게 아니라 참 다행이다.


"음... 네 좋아요! 이번 토요일에 봐요."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그와의 첫 공식 데이트.

그로부터 오는 설레임은 곧 미세 거울이 되어 내 모든 걸 돌아보게 했다.


그의 눈길이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아니, 그의 눈길이 쉽게 닿지 않는 곳마저도 내 신경은 곤두섰다.

평소 하던 메이크업은 어떻게 하면 커리어우먼처럼 당당해 보일까가 아닌

어떻게 하면 좀 더 여성스럽게, 빈틈이 생길 수 있도록 초점이 맞춰졌다.

화장품은 평소보다 적게 쓰진 않았지만 톤은 보다 연하게     

숨겨져 있던 보물을 발견해내듯 소위 말하는 청순함은 더 짙게

거울 속 나를 예쁘게 치장하고 꾸몄다.  

닳아 없어질 만큼 보고 또 본 거울 속의 나였지만

100퍼센트 마음에 들진 않는다.

급하게 했던 네일, 벼락치기하듯 급 굶은 한 번의 끼니

줄넘기와 스트레칭 등 달밤의 급 체조까지

모두 미리부터 차차 준비해오지 못한 나의 불찰인 듯하다.


톡톡,

"얘들아, 보통 처음 데이트 때 옷은 어떤 거 입고 나가?

색상 톤은 어떻게 맞추는 게 나을까? 

아무래도 머리는 묶거나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게 제일 낫겠지?

힐은 너무 높은 거 신으면 좀 그렇지? 어느 정도 키 차이가 이상적이야?

야 야, 나 메이크업한 거 사진 찍어 보낸다 보는 대로 빨리 의견 요망~"


처음 가볍게 시작했던 톡.

결국 친구들과의 단체 채팅방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화재를 진압하려 나선 친구들 중 한 명이 말하기를,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는 꼭 명심해!

외모는 조신하게, 행동은 곰살맞게.

넌 그 남자 앞에선 더 이상 커리어우먼이 아닌 여자인 거다."


'후우우~'


나 참, 입사 면접 보러 갈 때에도 긴장하지 않았던 내가 정말 떨린다.

설레임이란 현재 진행형은 느껴지는 어감만큼 나를 더 긴장시킨다.

약속 장소가 가까워지기 전, 다시 한번 거울을 보며 

내 머리, 메이크업, 옷 등을 조심스레 정리했다.

식당 문을 열고 아득한 조명이 비추고 있는 한 테이블이 보였고,

메뉴를 찬찬히 살피는 그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난,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설레임을 가득 안고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본 에피소드는 한창 연재를 진행 중인 로맨스 소설 '士내女내'의 다섯 번째 이야기입니다.  아래는 이전 에피소드 목록이며, 전편을 읽어보지 않은 분들은 차례대로 읽어보면 재밌을 듯싶습니다.


1편 - #1_'하다'는 것

2편 - #2_'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그럼

3편 - #3_오작동! 내 이성적 사고회로

4편 - #4_그 한마디가 나오기까지...

5편 - #5_설레임,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6편 - #6_넌, 이런 내 맘 알까?

7편 - #7_너라는 우주에 첫걸음

8편 - #8_시나브로 길들여지기

9편 - #9_보통남자? 보통이 아닌 듯

10편 - #10_보통여자? 내게는 다른 걸

11편 - #11_이 밤의 끝자락

12편 - #12_갈피와 타이밍

13편 - #13_참 묘한 '첫 통화'


- 퍼피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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