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흑(厚黑) vs. 박백(薄白)
후흑(厚黑) vs. 박백(薄白)
- [후흑학], 신동준, 2011.
"이종오가 사상 최초로 거론한 '후흑(厚黑)'이라는 용어는 각각 '면후(面厚)'는 '뻔뻔함'으로, '심흑(心黑)'은 '음흉함'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가 역설한 '후흑'의 궁극적인 목적은 '후흑구국(厚黑求國)'이다...
중국 전래의 제왕학이 바로 '후흑'의 이론적 근거인 것이다."
- [후흑학], <1부 1장. 후흑학의 탄생>, 신동준, 2011.
중국 역사상 '3대 기인'으로 불리는 청나라 말 사람 이종오(李宗吾)는 유교경전인 사서삼경이나 제자백가론, 역사서인 '24사' 등을 두루 공부했으나 이들로부터 이른바 '왕도(王道)'를 읽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기인'으로 평가받는 이유인데, 그는 역사상 천하를 거머쥔 인물들은 사실 '왕도'보다는 '패도(覇道)'의 제왕학을 실천했다고 보았다. 이종오는 남송의 주자학 또는 성리학 시대 이후 1천년 간 중국을 지배한 유교 이데올로기로서의 '인의(仁義)'보다는 도가의 '도(道)'와 불교의 '공(空)'에 기초한 소위 '후흑학(厚黑學)'을 제시했다.
1912년의 일이란다.
고전인문학자이자 언론인 신동준 선생이 이종오의 '후흑론'을 해설한 [후흑학](2011)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국제정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청말 외세열강의 공세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중국의 생존철학으로서 '후흑론'의 중요성을 재조명하고 현재에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라 쓰고 있다.
'뻔뻔함'과 '음흉함'의 처세술로만 알려진 '후흑학'은 생존을 위한 필수 이론이자 실천철학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느 개인 누구나 살아남기 위해 '후흑'의 처세가 필요하다는 건 다 안다. 다만 실천의 문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대다수는 저도 모르게 '후흑'의 선택을 할 것인데, 그럼에도 '인의'와 대의명분을 선택하고는 대쪽같이 부러지는 위인들은 '후흑'의 반대말인 '박백(薄白)'으로 불린단다. 낯짝 두꺼운 '면후'의 뻔뻔함 및 속이 시커먼 '심흑'의 음흉함과 대비되는 얼굴이 두껍지 못하여 맑은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면박'과 '심백'의 차원이다. 뻔뻔하고 음흉해야 살아남는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실천하지 못하고 거꾸러지거나 물러난 대부분 사람들은 역사의 위인이 되지 못한 '박백'으로 남았고, 천하를 거머쥔 위대한 인물들은 '후흑'의 대표자들이었다는 게 이종오의 [후흑학]의 주장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뻔뻔하거나 한없이 음흉하다고 해서 천하를 제패한 역사적 위인이 되는 건 아닐테다. 당대에는 잘 나가다가도 역사적으로 소인배가 된 경우도 많다.
그리하여 '후흑론'은 3단계로 구분된다.
[후흑학] <1부>에서 말하는 '면후심흑'의 3단계'(2장)는 다음과 같다.
1. 후여성장(厚如城墻), 흑여매탄(黑如煤炭) : 낯가죽이 성벽처럼 두껍고, 속마음이 숯덩이처럼 시꺼멓다. 평범한 사람들이 갖출 수도 있을 초보 단계로 여기서 멈추면 그냥 사기꾼이다.
2. 후이경(厚而硬), 흑이량(黑而亮) : 낯가죽이 두꺼우면서 딱딱하고, 속마음이 검으면서도 맑다. [후흑학]은 조조와 유비의 사례를 든다. 유비는 여기저기 빌붙으며 눈물로 인의를 호소하다가 결국 황제가 되었으니 '면후'의 달인이었지만 의리를 져버리지 못했으니 '심흑'은 부족했다. 한편 조조는 신의 용인술로써 '심흑'의 대가였음에도 '면후'가 부족하여 삼국통일을 이루지 못했단다. 동오의 손권은 '후흑'은 좀 알았지만 유비나 조조에 미치지 못했는데 다만 '면후'와 '심흑'을 그나마 균형적으로 부려 장수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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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후이무형(厚而無形), 흑이무색(黑而無色) : 낯가죽이 두꺼우면서도 형체가 없고, 속마음이 시꺼먼데도 색채가 없다. 이른바, '불후불흑(不厚不黑)'이라는 최고경지다. '대지약우(大智若愚)'와 같이 영리한데 멍청해 보이고 그럼에도 그 누구도 '후흑'의 혐의를 보지 못한다. 이종오가 가장 '후흑'의 대가로 꼽은 자가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사마의였다. 조조 사후 위나라를 두고 대외적으로는 제갈량과 내적으로는 조씨들 모두를 '후흑'의 전략으로 패퇴시키고는 사마씨의 세상을 연 사마의를 '후흑'의 역사에서 따를 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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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준 선생에 의하면 이종오의 '후흑론'은 도가와 불가의 공(空)과 도(道)를 따른다. 유가의 인(仁)과 의(義)를 앞세운 '인의론'은 결국 역사의 패배자로 '박백'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명철보신(明哲保身) 중 살아남는 게 지고의 가치인 '보신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청말의 혼란기에 중국 역사를 '후흑론'으로 정리한 이종오에게 중요한 단어가 또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바로 '구국(求國)'이다.
즉, 대의명분이 있는 생존투쟁의 큰 싸움판에서야말로 '후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른바 '후흑구국(厚黑求國)'이다.
이 사례로 [후흑학] <2부>는 역사상 구국과 천하쟁패를 앞둔 '후흑'과 '박백'의 투쟁을 소개한다.
1. 춘추시대 말기 월왕 구천(후흑)과 오왕 부차(박백) : 와신상담을 통해 부차에게 오랜 기간 몸을 굽힌 구천의 역사적인 복수는 서로 죽고 죽이는 본격적인 전국시대를 열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 말기 초한쟁패 또한 적이 죽어야만 내가 살아남는 '포스트-전국시대'였으니, 구천이야말로 '후흑'의 서막을 연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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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한전쟁 건곤일척의 주역인 한왕 유방(후흑)과 초패왕 항우(박백) : 서민건달 유방은 여러 재능있는 자들을 두루 품고 끝까지 야망을 밀어붙인 반면, 항우는 권토중래를 거절하고는 하늘을 탓하며 천하쟁패 투쟁을 쉽게 포기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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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신(박백)을 잡아들인 계책을 낸 장량(후흑) : 토사구팽을 예견하고 속세를 떠난 장량이 유방과 여후에게 한신을 토사구팽할 계책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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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비(면후)와 조조(심흑) : '면후'와 '심흑' 단계의 대표적 사례로서, '면후'와 '심흑'의 적절한 결합으로서 '후흑'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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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손권(후흑)과 사마의(불후불흑의 최고경지) : 손권과 동오의 장수비결도 사마의의 최고경지를 당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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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서삼경 중 [주역]을 즐겼지만 '박백'했던 장개석과 [자치통감]은 물론 [한비자]를 끼고 살았던 '후흑'의 모택동 : 최대군벌이 된 후 '후흑'을 버리고 기독교에 귀의한 장개석의 '박백'이 농민혁명의 시대적 대의를 앞세운 모택동의 '후흑'에게 패배한 역사는 이종오의 '후흑론' 이후 사례로서 신동준 선생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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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를 통틀어 '후흑구국'의 차원에서 논하는 '후흑학'은 바로 '제왕학'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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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흑학] <3부>가 전하는 '승자의 전략'으로서 '후흑술(厚黑術)'은 아래와 같다
1. 공(空) : 위기에서 빠져나갈 퇴로를 만들라. '교토삼굴'. 살아남기 위해 여기저기 굴을 파두는 전략이다. '공성계' 또는 '36계 주위상계(走爲上計:줄행랑)' 등이다.
2. 공(貢) : 반룡부봉(攀龍附鳳)하되 역린을 조심하라. 강한 자에게 붙되 거슬리지 말 것이다. 용의 등에 탔다고 자만하다가 [한비자] <세난>에 나오는 역린을 건드리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3. 충(沖) : 호언장담으로 기선을 제압하라. 빈천한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4. 봉(捧) : 박수갈채로 자부심을 만족시켜라. 대놓고 아부보다는 상대방이 듣고 보기를 바라는 대로 말하고 행하라.
5. 공(恐) : 솜에 바늘을 숨기고 때를 노려라. 섣불리 의중을 드러내거나 잘난 체 하지 말고 사마의처럼 때를 준비하라.
6. 송(送) : 비자금을 활동자금으로 활용하라. 상대방은 물론 영향력있는 주변에 뇌물도 필요하다. 유방의 책사 진평은 빈천하여 뇌물을 받았지만 이를 사적으로 쓰지 않고 전쟁 승리를 위해 항우 주변에 뿌리는 뇌물로 썼다.
7. 공(恭) : 사람을 가려 때에 맞게 칭찬하라. 타국 출신 관리와 책사들을 배제하려는 진시황의 '축객령'을 철회시킨 초나라 출신 진나라 유세객 이사의 '간축객서'는 제갈량의 '출사표'못지 않은 역사상 명문이다. 태산은 먼지 한 톨도 거부하지 않고 대해는 작은 물줄기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간축객서'를 쓴 이사는 진시황 전국통일 최초의 승상이 된다.
8. 붕(繃) : 큰 인물로 포장해 신뢰케 만들라. '36계' 중 제1계인 '만천과해(瞞天過海)'는 천자인 당태종을 속여 바다를 건너게 한 설인귀의 설화에서 유래한다.
9. 농(聾) : 귀머거리 흉내로 속셈을 감추라. '36계'의 27계인 '가치부전(假痴不癲)'은 어리석은 척 하며 상대방을 속이는 적극적인 전술인데, 사마의처럼 의중을 끝까지 감추는 방책이다.
개인의 생존과 처세에서 누구나 내심 떠올리고 만지작거리는 '후흑술'은 '구국'의 거대한 생존투쟁에서는 더더욱 필요한 전략임에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종오가 중국 역사에서 오랜 기간 경직된 '인의론'를 넘어 '후흑구국'의 실천철학으로 무장하여 외세를 물리치자고 강력 주장한 것 또한 동서고금의 진리다.
그럼에도 '인의'를 지키려 한 역사를 그냥 '박백'으로 치부해버리는 건 어쩐지 입맛을 쓰게 한다.
내 생각에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내심 알고는 있을 저 '면후'와 '심흑'의 실천이 과연 훈련으로 가능할까 싶기 때문이다.
아니면,
아직 내가 '구국'의 차원만큼 생존이 절박하지 않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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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흑학(厚黑學)], 신동준, <위즈덤하우스>, 20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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