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예요, 언니가

춘몽_#2016년 10월

by 토토

어젯밤 당신의 꿈은 어떠했나요. 절벽같이 검은 밤, 누구를 만난 건가요. 그곳은 당신이 몸을 누인 누비이불처럼 안온한 세계였나요. 악하고 흉한 것들이 뒤엉킨 곳이었나요. 어쩌면 가면들의 세계, 잿빛 거리를 하염없이 거닐다가 돌아온 건 아니였나요. 저는 조금은 몽롱하고 단맛이 나는 이곳, <춘몽>의 세계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어디로 가든 타향일 수밖에 없을 당신과 내가 만날 이곳에는 빈 잔이 놓여 있고, 누군가의 취기와 검붉은 포도향이 먼지처럼 부유합니다.

<춘몽>의 감독 장률이 허공을 우두커니 응시하는 고향酒幕의 스틸에서 눈을 뗄 수 없습니다. 그의 세계에서 등장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은 비단 예리와 정범, 익준, 종빈만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듯, 언젠가 나와 같은 당신이 저를 기다리는 일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는 없되 아침부터 깊은 밤 녘까지 이어지는 대화가 있는 이곳이 <춘몽>의 세계입니다.

이 곳에는 詩가 있습니다. "詩라는 것을 쓸 줄 안다"는 주영이 있고, 시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말하는 예리가 있고, "시예요, 언니가"라 말하는 주영의 말 뒤에 묵직하게 자리하는 온건함이 있는 곳입니다. 누군가가 詩로 인식될 수 있는 이곳에는 은유가 흘러넘칩니다. 당신의 세계에는 어떤 詩가 있나요. 준비된 표정과 명징한 판단만이 살아남는 도시에선 몇몇 詩는 얼어붙고 말 것입니다. 주영이 예리에게 남긴 편지에는 입술소리가 돌고 도네요.

오래전 당신은 고향을 떠났습니다/ 돌아오라고 손짓하던 고향은 당신 대신 늙어가고 있어요/ 백두산이 슬픔으로 반백이 되고/ 천지 안에 눈물이 마르기 전에/ 당신을 그곳에 데려주고 싶어요/ 당신을 보낸 나는 떠나지도 남지도 않겠지만/ 백두산의 안개를 밀어내는 건 또 다른 안개이듯/ 천지의 물을 흘려보내는 건 또 다른 물이듯/그리움을 밀어낸 그리움의 자리에 제자리 한 뼘쯤 나지 않을까요/

예리와 주영, 세 남자와 또 어떤 이들이 느릿느릿 발길을 옮기는 수색동 골목길을 걷다 보면 십수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환영이 어른댑니다. 세상의 모든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이곳에 모인 것처럼 이곳에는 아직 그림자가 있고, 구름이 있고, 버려진 장롱과 기도, 占집이 있습니다. 거동은커녕 눈도 뜨지 못하는 아버지를 수발하는 예리에게 "아버지는 오래 살겠다"는 점쟁이의 말이 소곤소곤 여진을 일으킵니다. 아마도 그 진동이 예리를 춤추게 했을지 모르겠군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란 산울림 김창완의 노랫말이 실핏줄을 타듯 골목길을 훑어냅니다. 이제는 밤이 깊었습니다. 누구의 꿈일지 모르는 이곳, <춘몽>의 세계에서 소주잔을 마주합시다. 영화 같은 꿈속에서 열일곱 잔쯤 마주하다 보면 예전보다 조금은 따뜻해질 테니까요. 비록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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