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코의 손찌검, 숙희의 오른손

아가씨_#2016년 6월

by 토토

카프카(Franz Kafka)는 말했다.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주어보다 목적어에 눈이 간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빙해(氷海). 카프카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응시해보자. 넘실대던 파도, 휘도는 물길이 천천히, 하지만 움츠리듯 단단하게 얼어붙고 있다.


그곳에는 원시의 감각과 감정, 저 몰래 횡사한 것들이 박제돼 있다. 얼어붙은 가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곳에선 하얀 편견이 피어오른다. 뒤이어 속박, 폭력과 위선들까지, 사실 그 모든 것이 거기서 시작됐는지 모른다.

감독 박찬욱은 수년간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에 도끼질을 해댔다.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로 이어지는 이른바 복수 3부작을 통해 인간 근저의 그 무엇을 날 것으로 드러냈으며, 근친상간, 신부의 사랑(박쥐, 2009) 등과 같은 소재를 활용하며 금기(禁忌)의 경계에서 외줄을 탔다.


그런 그가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 이후 3년 만에 신작 '아가씨'를 내놨다. 영국 소설가 세라 워터스의 원작 '핑거스미스'를 각색한 이 영화는 개봉 이전부터 스타 배우의 등장과 동성애를 다뤘다는 이유로 주목받았다. 동성애 소재에 박찬욱이 가려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는데, 우리 사회가 동성애를 바라보는 방식을 가늠할 수 있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영화 아가씨의 정수(精髓)는 히데코(김민희 粉)의 한 대사에서 엿볼 수 있다. 일종의 형용모순인 이 대사는 부모를 잃고 후견인인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 粉)에게 학대받고 살아온 히데코의 단말마 같은 사랑노래다.


타마코는 숙희(김태리 粉)의 다른 이름이다. 소매치기에 고아로 자란 숙희는 어느 날 사기꾼 백작(하정우 粉)의 제안을 받는다. 막대한 상속재산을 지닌 히데코를 유혹해 재산을 가로채자는 것. 백작은 히데코의 미술선생 자격으로 히데코에 접근하고, 숙희는 그녀의 하녀 노릇을 하며 그녀의 의중을 살피고, 마음을 뜨게 만든다.

문제는 히데코를 감쪽같이 속였어야 하는 숙희의 흔들림에서 시작된다. 흔들림의 진원(震源)은 알 길이 없지만, 그 흔들림은 히데코를 흔들고 둘은 사랑과 배반 가운데 휘청인다.


히데코와 숙희, 두 존재가 각자의 절벽 끝에서 서로를 탐하고, 또 배반에 치를 떠는 모습은 동성애란 단어에 서린 편견을 무참히 깨부순다. 히데코의 손찌검과 숙희의 떨리는 오른손. 그것은 달리 말해 인간적이며, 그들의 사랑, 그들의 연대는 감옥이나 다름없던 코우즈키 저택을 벗어나는 장면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박찬욱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소재 선택의 기준은 내러티브(narrative)에 따른다고 강조해왔다. 사회 윤리에 반하는 충격적 소재를 일부러 선택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힘줘 대답한 것을 보면 그의 말엔 다소간의 신경질이 묻어난다. 충격적 소재의 힘을 빌어 대중의 눈을 끄는 값싼 영화나 만드는 줄 아느냐고 반문한 격이다.


박찬욱은 씨네21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아가씨를 퀴어(Queer) 영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인터뷰 글을 빌리자면 그는 <아가씨>는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맞서 싸우는 퀴어영화는 아니다. “우리 사랑을 인정해주세요”가 아니라 “당연한 건데 뭐가? 왜?” 하는 식으로, 굳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노멀한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핵심이었다.고 했다.


그는 미국 소설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차기작을 준비 중이다. 제목은 '도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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