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역사(5) : 할리우드 흥행 기록을 경신한 로맨스물
로맨스물에서의 이세계
로맨스물은 개인의 감정에 집중한 미시적인 작품이다. 로맨스 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주변 상황보다도 주인공과 상대방이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의 여정>에서 영웅이 떠나는 이세계를 로맨스 물로 치환해 보면, 주인공이 상대방을 만나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를 변화시킨 세계가 남북전쟁이 아닌 결혼과 남북전쟁에 의해 닿을 수 없게 된 첫사랑이 되는 이유도 그렇다. 작품을 잘 보면 스칼렛의 세계가 무너진 건 남북전쟁 때문이 아니라 애슐리가 자신의 남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끝없이 분노하고, 엉뚱한 남자들과 결혼하며 자신의 삶을 위태로운 세계로 계속해서 밀어 넣는다. 해당 과정에서 주요하게 작용되는 남북전쟁은 어떻게 보면 그저 스칼렛에게 진정한 사랑이 누군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의 시련 장치일 뿐이다. 마음도 경제적 안정도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도 결국 그녀의 곁에 누가 있었는가. 그녀의 진정한 사랑은 누구이며, 스칼렛은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 마치 응답하라 시리즈의 남편 찾기를 보듯 관객들은 그녀의 삶에 마음 졸이며, 그녀가 환상에서 벗어나길 바라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의 환상이라는 이세계를 다녀온 스칼렛이 레트를 붙잡았을 때 관객들은 그녀의 선택에 안도하는 동시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끼게 된다.
어떻게 보면 실패한 영웅 서사의 이야기가 바로 제한 시간 안에 환상에 깨지 못해 진정한 사랑이란 보상을 놓치게 되어버린 스칼렛의 이야기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고전 할리우드를 꽃피운 로맨스
비슷한 맥락에서 할리우드 최고 흥행작이었던 <사운드 오브 뮤직>(1965)과 <타이타닉> 역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로맨스물이며, 할리우드의 역사를 새로 쓴 흥행작이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뮤지컬 영화가 한창 유행했을 당시 인기 뮤지컬 원작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그리고 이 영화 역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당시 한 수녀원 지원자가 사랑에 대해 전혀 모를 것 같은 대령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녀에게 있어 새로운 시련의 장소는 대령의 집이다. 그리고 그녀가 대령의 집에서 7명의 아이들과 함께 보내며 얻게 된 평생을 혼자 살아가야 하는 수녀의 삶이 아닌, 대가족과 함께 하는 삶이다. 즉, 이 작품은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신밖에 없을 거라 믿어왔던 한 사람이 행복한 가족을 얻는 가족 서사인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마찬가지로 2차 세계 대전은 중요한 사건이긴 하지만, 그녀가 가족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 장치로만 쓰이고 그 이상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1997)은 <대부>(1972)와 같은 누아르 장르가 유행했던 시기를 거쳐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1975)와 <ET>(1982), <쥬라기 공원>(1993) 그리고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1977)와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성공한 이후 흥행의 역사를 새로 써 내린 작품이다. <타이타닉>(1997) 이전에 흥행했던 영화들의 리스트만 보아도 <타이타닉>의 등장은 굉장히 의외인 것이었다.
다른 영화들은 우주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우주선을 탄 채 광선검을 휘두르고, 공룡이 나타나 사람을 잡아먹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등 세계가 전복되는 거대 담론을 다루고 있는데, <타이타닉>은 이 모든 영화들의 제작비를 모두 넘긴 2억 달러를 들여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연출하겠다고 하니, 이 영화의 성공을 장담한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을 만도 했다. 거대한 제작비는 스케일이 큰 영화에만 필요한 것이라 생각되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이타닉>은 전무후무한 흥행 기록과 함께 지금까지 쌓아온 할리우드 흥행의 역사를 새로 쓴 작품으로 기억된다. 흥행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타이타닉>이 셰익스피어의 명작 <로미오와 줄리엣>을 근간으로 한 비극적 사랑을 다루기 때문으로 손꼽힌다.
로맨스 물은 개인의 좁은 세상을 다루기 때문에 스케일을 키우기가 쉽지 않지만, 반대로 연령과 국가를 뛰어넘어 모든 이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거대 담론은 아무래도 정치나 사회적 현상을 다루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이해관계와 문화를 짙게 표출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지만 미시 담론은 오직 개인의 감정을 다루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경험과 환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이야기는 연인 간의 비극적 사랑뿐만 아니라 불의의 사고로 인해 사랑하는 이를 잃는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했으니 공감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질 만도 했다.
그러나 타이타닉은 블록버스터가 아닌 영화가 흥행의 기록을 세운 마지막 사례가 될 것이다. 고전 할리우드 시대에서는 인물의 복잡한 감정선을 예술적으로 그려내는 것에 집중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야기를 얼마나 확장성 있게 상업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느냐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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