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가는 카페가 생겼다. 차를 대고 내리면 편안한 파도 소리가 들린다. 작고 귀여운 해변이 보이고, 그 가운데엔 하얀색 등대와 빨간색 등대가 연인처럼 다정하게 서 있다. 내가 가는 시간은 보통 평일 오후이기 때문에 나와 나의 일행만이 카페를 채우고 있을 때도 많다. 아이스라떼를 들고 이층에 올라가면 커다란 창문으로 차에서 내릴 때 봤던 그림의 전체를 다시 볼 수 있다. 그림 속에 있어서 다 볼 수 없었던 그림을 멀리서 다시 보는 것이다. 유명하지 않은 인디 음악들이 흘러나오며, 적어두고 싶은 노랫말이 기분 좋게 귀에 닿는다. 커다란 유리머그에 카페라떼의 베이지 색이 얼음만 남기고 사라질 때까지 앉아 있는다. 그러면 어디서 해가 떨어지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 때문에 변한 핑크색 하늘을 볼 수 있다. 뒤이어 까맣게 변해가는 바다와 하늘을 인공의 전구가 밝히는 것까지 볼 수 있다. 그렇게 바다색과 같은 톤이던 하늘이 핑크색이 되고, 연이어 새까매져 줄지은 노란 전구가 반짝거릴 때까지 창밖을 보고 있노라면, 별 것 아닌 내 하루가 너무 좋아져 사랑하는 사람들을 데려와 한 명 한 명 내 앞에 앉히고 싶은 욕심이 난다.
신기하게도 이 곳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이다. 유명하지 않은 나는 유명하지 않은 곳에서 유명하지 않은 노래를 들으며 유명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경성대 앞 술집이 많은 골목에 가끔 가던 라이브클럽이 있었다. 거기서 로우필즈라는 인디밴드의 음악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음악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나는 음악이 배경이 되어 주는 것을 좋아한다. 음악 자체에 푹 빠지기 보다는 그 음악이 내 안에 있는 어떤 감성을 건드리고 증폭시킬 때, 그러한 감성 속에 푹 빠져있기를 좋아한다. 음악으로 흥건해진 기억이나 상상 안에서 부유하며 거기서 느끼는 감정을 진하게 맛보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로우필즈의 음악은 그런 내 음악 취향에 딱 맞았다. 담백하고 깨끗했다. 올해 봄이 오기 전 마지막 앨범을 냈다는 아쉬운 소식을 들었다. 그 앨범 안에 'pink'라는 곡은 로우필즈의 곡 중 가장 좋았다. 들을 때마다 지나간 기억이나 겪지 않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떤 사랑에 대입해도 꼭 맞을 것 같은 노랫말과 단정한 멜로디가 제목만큼이나 사랑스럽다.
제주에 가면 무조건 가는 식당이 있다. 오 년 전쯤이었나. 가성비 좋기로 유명하다고 숙소 호스트가 추천한 흑돼지 집을 찾았다가 쉬는 날이라 허탕을 친 적이 있었다. 너무 배가 고파 어쩔 수 없이 그 맞은 편에 있는 허름한 식당에 들어간 것이 첫 인연이었다. 고기면 다 괜찮지 않을까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90년 대 기사 식당 같은 외관에 딱 어울리는 알루미늄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나는 그곳에서 현지인들만 아는 숨은 맛집의 냄새를 맡았다. 문을 여니 알루미늄 미닫이 문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풍경이 펼쳐졌다. 난닝구 같은 낡은 티셔츠에 작업복 바지를 입은 검게 탄 아저씨들이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 테이블 위에 올라온 찬거리부터가 일품이었다. 흑돼지는 고기맛도 고기맛이지만 찍어 먹는 멜젓이 중요하다. 비계가 반 정도 붙은 두꺼운 살코기에 제주에서 대대로 산 집안의 할머니가 만든 것 같은 멜젓을 찍어 먹고, 한라산 소주를 목으로 넘길 때의 그 맛이란. 유명해지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주인 아주머니의 시크한 태도가 고기 맛을 더 좋게 한다. 그 모든 풍경들이 레트로하게 잘 어울려, 나조차도 그곳에 갈 땐 낡은 옷을 입고 가야하나 싶을 정도이다. 지글지글 소리와 진하게 묵은 맛이 살아 있는, 아주 오래된 흑백 영상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든다.
며칠 전 프란시스 작가님이 보내주신 책 '90's KID'나 아침에 커피를 마시며 읽은 내가 구독하는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 엄마 생일마다 예쁜 꽃을 만들어주시는 동네 꽃집 사장님이나 내게 요가나 피아노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들. 놀랍도록 회를 잘 썰던 동네 횟집의 베트남 총각이나 기가 막히게 부드럽던 동네 빵집의 에그타르트.
너무 사랑스러워 몰랐으면 어쩔 뻔 했나 싶은 것들은 생각해 보면 다들 우연히 내 삶에 찾아온 유명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나는 그 존재들의 희소함과 고유함을 사랑한다.
내 삶 또한 그리 대하고 싶다.
돌이켜 보면 내 삶이 좋다고 여겨지는 순간은 특별한 이벤트가 일어나는 때가 아니었다. 이제 사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짧지 않은 삶 동안 나는 많은 일들을 겪었다. 회상하기 끔찍한 불운을 겪기도 했고, 상상도 못했던 행운이 찾아오기도 했다. 낙심으로 고개를 못 들던 실패와 가슴 뻐근한 성취도 지나갔다. 시나리오처럼 로맨틱한 사랑과 지금 떠올려도 가슴이 절절한 이별을 겪기도 했다. 그런 커다란 일들은 그것이 일어나는 그 때를 제외하면 대체로 무뎌져서 평범한 일상으로 변해가곤 했다. 뜨거운 환희나 감당못한 고통은 어느새 당연히 내 삶에 원래 포함되어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상에 스며들어 갔다.
어릴 때는 종종 내 삶에 아주 대단한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곤 했다. 고단한 오늘을 참으면 오늘과는 다른 얼굴을 한 근사한 내일이 올 거라 꿈꿨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른 태도로 삶을 대하게 되었음을 느낀다. 대단한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거나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 내 삶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다 해도 그냥 내 삶이 오늘처럼 그대로 흘러가는 것이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금처럼 상하지 않을 만큼의 일을 해서 적당히 먹고 살고, 사랑하는 이들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지금처럼 바다와 숲으로 위로 받고 영화와 소설과 음악을 곁에 두고 즐길 수 있다면. 지금처럼 나눈 사랑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문장으로 옮길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어떤 쪽으로 내 삶이 흘러간다 해도 나는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괜찮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벽돌을 쌓아 성을 쌓는 것이 아니고, 성이 무너져도 그대로 남을 벽돌 하나하나를 예뻐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비싸지 않은 가구와 소품들, 페인트 칠이 벗겨진 콘크리트와 디자인이 다양한 소박한 조명들. 부러 맞추지 않은 다양한 색감과 소재가 이 카페를 더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한다. 억지로 애쓰지 않고 욕심 없이 좋아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취한 내 오늘이 모여 결국 내 삶이 될 것이다.
간절히 원하는 바가 이루어져서 더 자유롭고 화려해진다면 당연히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도 꽤 마음에 드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이 선명한 실감이, 지금껏 유명치 않은 나를 지켜 온 내 유일한 ‘자존’이 아닌가 싶다.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
-윤동주, ‘내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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