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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가 지망생 Mar 21. 2016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겠니?"

로봇 시대의 기본소득 <3>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로 나눴다고 합니다. 프락시스, 포이에시스, 테오리아.      


‘테오리아’란, 철학 또는 수학적 활동입니다. 구체적인 대상을 다루는 게 아니죠. 형이상학 영역입니다. 실제 세계를 다루는 활동은 앞의 두 가지, '프락시스'와 '포이에시스'입니다.      


‘프락시스’란, 실천 또는 활동쯤으로 번역됩니다. 활동의 목적이 자기 내면에 있는 거죠. 자발적인 정치 활동, 시민단체 활동, 동아리 활동 등이 이런 경우일 겁니다.      


‘포이에시스’란, 제작 또는 노동쯤으로 번역됩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하는 일이 대개 이 경우입니다. 활동의 목적이 자기 바깥에 있죠. 반도체 공장 노동자는 ‘반도체 제작’이라는 목적을 위해 일합니다. 그 목적은 자기 내면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활동에 대한 평가 역시 자기 외부의 기준에 따라 이뤄집니다.      


저도 철학을 잘 모르는데요. 얄팍한 지식에 비춰보면, 프락시스, 포이에시스, 테오리아라는 세 가지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 라는 질문이 서양 철학사의 중요한 화두였던 것 같습니다.      


거칠게 분류하면 테오리아와 프락시스는 귀족의 몫이죠. 포이에시스는 노예 또는 농노의 몫일 겁니다. 프락시스, 포이에시스, 테오리아에 대한 논쟁은 결국 귀족과 노예의 관계에 대한 것이겠죠. 혹은 순수학문과 실용학문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요.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걸 소비하기만 합니다. 다른 이들은 평생 그걸 생산합니다. 이 두 집단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거냐, 라는 거죠.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칸트, 헤겔, 마르크스가 각각 나름의 설명을 내놨습니다. 20세기의 철학자들 역시 다양한 설명을 했습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떠드는 건, 얼마 전의 알파고 충격 때문입니다. 저 역시 무척 놀랐습니다. 특히 두 번째 대국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날 대국 직후, 몇몇 친구들과 술을 마셨는데요. 충격 때문에 얼떨떨한 상태에서 술을 들이부었던 기억이 납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어디까지 발전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지금 속도로 계속 발전한다고 치면, 철학적으로도 대단한 사변일 듯합니다.      


프락시스, 포이에시스, 테오리아 사이의 관계 설정이 철학의 오랜 논쟁거리였던 건, 이 세 가지가 모두 인간의 영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왜 누구는 평생 프락시스만 하고, 다른 누구는 포이에시스만 하느냐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테오리아처럼 고상한 짓만 하고 사는 녀석이 평생 포이에시스만 한 사람보다 우월한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도 물을 수 있죠. 어찌됐건 별의별 질문이 다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질문들에 대해 철학자들은 이런저런 답을 내놨고, 논쟁을 벌였죠.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앞의 세 가지 가운데 포이에시스가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나버린 겁니다. 인공지능과 로봇 때문에요. 물론, 조금 극단적인 이야기입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아무리 발달해도, 포이에시스에 종사하는 인간이 많이 있을 겁니다. 다만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달은, 포이에시스에 종사하는 인간의 수를 대폭 줄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어질 따름이죠. 일단 편의상 이런 가능성이 완벽하게 실현됐다고 칩시다.       


그렇게 되면, 앞서의 다양한 철학적 논쟁들이 의미를 확 잃어버리죠. 그건 어쩌면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겁니다. 직업적인 철학자, 철학 전공자들에게만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관행, 문화가 대부분 포이에시스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는 거죠. 여기에 변화가 생길 텐데요. 


흔히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일’은 프락시스가 아닙니다. 포이에시스죠. 요컨대 우리가 받는 월급은 포이에시스의 대가입니다. 내키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한 대가로, 우리는 돈을 법니다. (반대로, 프락시스는 보통 돈을 내고 합니다. 시민단체에 회비를 내죠. 정당에는 당비를 내고요.) 


어릴 때 자주 듣던 말, ‘세상에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포이에시스 중심 세계관이 응축돼 있는 표현이죠. 


그런데 어쩌면, 우리 자식 세대는 포이에시스를 하고 싶어도 하기 힘든 지경에 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네 일자리 및 임금 체계는 모두 포이에시스 중심 세계관에 맞춰서 설계돼 있죠. 그런데 인공지능과 로봇이 포이에시스를 도맡게 되면, 우리가 흔히 일자리라고 부르는 것들도 함께 사라집니다. 월급 받을 기회도 같이 줄어들죠.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에 관심이 가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소득이 반드시 포이에시스의 대가이어야 한다면, 우리 자식 세대는 대부분이 소득 없이 살게 될 겁니다. 기본소득은 소득과 포이에시스의 상관관계를 끊는 발상입니다. 포이에시스가 인간의 영역을 떠난 뒤에도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지금과는 다른 개념의 소득이 필요합니다. 

     

소득과 포이에시스가 결합한 지금 체제가 얼마나 정당한지에 대해서도 의심이 갑니다. 예컨대 이런 겁니다.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터에서 포이에시스를 합니다. 그런데 포이에시스의 결과물이 과연 얼마나 ‘쓸모’가 있나요?      


생존 그 자체만을 위해 일을 하던 시절에는 포이에시스와 쓸모 사이의 관계가 긴밀했습니다. 쓸모없는 포이에시스를 할 여유 따위가 없었죠. 


하지만 지금 우리가 지닌 생산능력은 생존 그 자체만을 위한 수준을 훌쩍 넘어섭니다. 그러니까 쓸모없는 재화나 서비스도 많이 생산하죠. 물론 인간은 동물이 아니므로, 생존만을 목표로 삼을 수는 없죠. 생존이라는 목표에 비춰서는 쓸모없어 보이지만 다른 목적을 위해선 쓸모 있는 것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쓸모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기는 어려울 겁니다.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테니까요.      


문제는 이처럼 쓸모 여부가 모호한 걸 만들기 위해 무지막지한 포이에시스가 투입된다는 겁니다. 투입된 포이에시스가 낳은 고통의 합계가 쓸모의 합계보다 크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런 생산은 과연 정당성이 있을까요? 


이런 노동이 참 많죠. 아마 군대 다녀온 분들은 공감할 겁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사회적으론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런 포이에시스는 어쩌면 낭비일 텐데요. 개인 입장에선 그래도 해야 하죠. 그래야만 생존에 필요한 돈을 버니까요. 만약 기본소득으로도 생존이 가능해진다면, 이런 종류의 포이에시스를 거부하는 이들이 확 늘어날 겁니다. 굳이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달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말이죠.    


기본소득은 결국 포이에시스 중심 체제에서 프락시스 중심 체제로 넘어가는 과정과 맞물려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남성 시민들의 삶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 자식 세대는 그리스식 민주주의를 누리게 될까요? 시민 대부분이 정치에 참여하는 사회에서 살게 될까요? 정치와 철학, 예술과 스포츠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회에서 살게 될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어째 좀 불안합니다. 




소설가 지망생입니다. '알을 품은 섬'이라는 소설을 연재 중인데, 진도가 잘 안 나가네요. 소설 속에 보면, 알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포이에시스' 개념을 떠올리며 구상한 캐릭터입니다. 알에서 난 자들은 포이에시스에 종사하고, 묵가 철학을 따릅니다. 사람의 자식들은 '프락시스+공자 철학'입니다. 이들 두 집단 사이에 있는 '기불' 소년은 맹자 철학을 구현하고 있고요. 이런 구상을 하고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영 글이 안 풀리네요. 소설가 지망생이 지망생 꼬리표를 떼어내기란, 영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소설 '알을 품은 섬'


첫 번째 이야기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두 번째 이야기 :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세 번째 이야기 : "활 잘 쏘는 자가 왕 노릇 하는 까닭"

네 번째 이야기 : "화살 맞아도  끄떡없으니 활쏘기란…" 

다섯 번째 이야기 : "화살이 눈에 박히자 가야 전사들은"

여섯 번째 이야기 : "그 활로 나를 쏘거라"

일곱 번째 이야기 : "그들을 나와 함께 황천으로 보내라"

여덟 번째 이야기 : 왕이 제 자식 죽인 자를 접대한 까닭

아홉 번째 이야기 : "죽은 왕은 알에서 태어났소"

열번째 이야기 : "우리 자식들 대신 그들을 묻읍시다"

열한 번째 이야기 : "죽은 왕은 썩은 피를 타고 났소"



소설 '내 남자친구는 북한 간첩'


<1> 내 남자친구는 북한 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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