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지망생이 읽은 <맹자>
'내 인생의 책' 따위의 질문을 받으면 당황스럽다. 책읽기로 보낸 시간이 분명히 길다. 집에 쌓인 책도 많은 편이다. 그런데 막상 '내 인생의 책'을 고르려 하면, 생각나는 게 없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내가 끝까지 읽은 책이 얼마 안 된다. '내 인생의 책'이려면, 적어도 완독은 했어야 할 게 아닌가. 하지만 그런 게 별로 없다. 그리고 정독한 책은 더 적다. 설령 끝까지 읽었더라도 말이다. 대충 이런 이야기구나, 이렇게 넘어간 책이 대부분이다.
또 하나는 내가 읽은 책 가운데 대부분은 유통기한이 짧은 것들이다. 이른바 고전이 별로 없다. 인문학 전공자가 부러울 때가 있다. 그들은 억지로라도 고전을 읽은 경험이 있다. 예컨대 영문과 학생은 중간, 기말고사 때문에라도 제프리 초서와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다. 철학과 학생 역시 억지로라도 칸트나 헤겔의 저술을 읽는다. 비전공자가 이런 책을 직접 읽기란 쉽지 않다. 기껏해야 요약본을 들춰볼 따름이다.
지금 돌아보니, 고전을 많이 못 읽은 게 후회스럽다. 지금 읽자니 어렵다. 생각의 호흡이 짧아진 탓이다. 천천히 뜸을 들여 읽어야 하는 글은, 확실히 버겁다.
그나마 내가 읽은 고전을 꼽아보게 된다. 괜히 정이 간다. 우선 성서가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성당에 다녔으니까. 또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술들이 있다. 이런 책들도 분명히 고전이다. 안타깝게도, 성서나 공산당 선언, 국가와 혁명 따위에서 감동을 받은 기억은 없다. 그냥 읽어야 할 것 같아서 들춰봤을 뿐이다.
그런 것말고는 떠오르는 고전이 딱 하나뿐이다. 바로 맹자다. 그러니까 내 인생의 책을 굳이 꼽자면, 맹자를 골라야 할 것 같다. 20대 시절 맹자를 읽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그건 또 모르겠다.
맹자의 인상이 강렬했던 만큼, 후유증도 컸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방황(?)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구절이 많은데, 맥주 한 잔 들이킨 지금은 이 대목이 떠오른다.
"矢人惟恐不傷人(시인유공불상인) 函人惟恐傷人(함인유공상인) 巫匠亦然(무장역연) 故術不可不愼也(고술불가불신야)"
화살 만드는 사람(시인)은 사람을 다치게 하지 못할까봐 두려워 한다. 갑옷(혹은 방패 등 어찌 됐건 보호 장비) 만드는 사람은 사람을 다칠까봐 두려워 한다. 무당이나 장인이 다 마찬가지다. 결국 기술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과대학에 다니다 이 대목을 읽었다. 우와, 말 그대로 한대 맞은 느낌이었다. 요 대목 앞에 있는 내용은 시인(화살 만드는 사람)이 함인(갑옷 등 보호장비 만드는 사람)보다 특별히 더 나쁜 사람은 아니란 거다. 인간 본성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거.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하느냐가 사람의 태도와 성정을 정한다는 것. 따라서 어떤 기술을 익힐지에 대해서 아주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거다. 공대생인 나는 과연 내 전공, 혹은 미래 직업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나. 이런 생각을 하니까 오싹해졌다. 내가 만약 화살 만드는 일을 한다면, 나는 평생 내가 만든 화살이 남을 다치게 하지 못할까봐 걱정할 게다. 나는 이렇게 살아갈 준비가 돼 있나. 만약 그런 삶이 싫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꽉 막힌 느낌. 그걸 잊기 힘들다.
기자가 된 것도 어쩌면 그래서였다. 기술자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내가 만약 화살 만드는 기술자라면, 나는 평생 남을 다치게 하지 못할까봐 두려워 할 게 아닌가. 그런데 나는 내가 화살을 만드는지, 갑옷을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아예 무엇을 만드는 일 자체를 하지 말자. 기술 따위를 익히지 말자. 이런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기자로 십수 년을 보낸 지금, 맹자가 다시 떠오른다. 20대 시절에는 그냥 지나쳤던 구절이 눈에 밟힌다. 巫匠亦然(무장역연). 대학 시절엔 이 구절이 왜 있는지를 몰랐었다. 그래서 건너 뛰었었다. 지금은 확 꽂힌다. 무당이나 장인이나 다 마찬가지다. 맞다. 나는 장인이 싫었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비켜갔는데, 지금보니 내가 하는 짓, 그러니까 기자 노릇이 딱 무당놀음이다. 무당도 장인과 다를 바 없다. 내가 뱉어낸 점괘가 나를 구속한다. 내가 기사로 누군가를 저주했다면, 나는 그 저주가 실현되지 않을까봐 두려워 한다. 저주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맙소사, 화살 만드는 장인이 사람을 다치게 하지 못할까봐 두려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어쩐지 오싹하다. 기자 노릇 빨리 관두고, 소설가로 전업해야겠다. 이런 결심을 다시 굳히는 밤이다.
소설가 지망생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巫匠亦然(무장역연)"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이렇습니다. 巫, 무, 그러니까 무당은 요즘으로 치면 의사입니다. 匠, 장, 장인은 여기서 관 짜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의사는 자신이 치료하는 사람이 죽을까봐 걱정한다. 환자가 죽으면 평판이 떨어지고, 장기적으론 수입이 줄어들겠죠. 반면 관 짜는 사람은 환자가 안 죽을까봐 걱정한다. 그럼 당장 수입이 줄어듭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선한 본성을 보존하고 싶다면, 기왕이면 관 짜는 일보다는 의사 노릇을 택해라. 이런 뜻이란 거죠.
그런데 좀 밋밋한 해석이라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었습니다. 그래서 약간 변주를 해봤습니다.
무당은 결국 점치는 사람인데, 자신의 부정적인 점괘가 실현되지 않을까봐 걱정한다는 걸로요. 언론계에도 이런 무당들이 많죠.
소설 '알을 품은 섬'
첫 번째 이야기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두 번째 이야기 :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세 번째 이야기 : "활 잘 쏘는 자가 왕 노릇 하는 까닭"
네 번째 이야기 : "화살 맞아도 끄떡없으니 활쏘기란…"
다섯 번째 이야기 : "화살이 눈에 박히자 가야 전사들은"
일곱 번째 이야기 : "그들을 나와 함께 황천으로 보내라"
여덟 번째 이야기 : 왕이 제 자식 죽인 자를 접대한 까닭
열번째 이야기 : "우리 자식들 대신 그들을 묻읍시다"
열한 번째 이야기 : "죽은 왕은 썩은 피를 타고 났소"
소설 '내 남자친구는 북한 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