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뚜르드몽블랑(TMB) 일주(3) 뜨렐라떼뜨에서 본옴므고개
잔인한 세번째날 아침. 지갑 사건(전편 참조)으로 우리는 풀이 죽어 말없이 산을 내려갔지만 저 멀리 펼쳐진 산세와 그림같은 마을의 모습에 이내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다. 가파른 내리막을 지나니 숲의 절벽사이로 폭포가 떨어지는 그림같은 모습에 둘다 눈이 휘둥거린다. 가라앉은 기분으로 걷기엔 눈앞이 너무 그림이다.
“이 날씨 내가 산거야”
언니는 맑은 하늘과 풍경을 보더니, 지갑안에 있었던 로또가 아무래도 1등인것 같다며 20억으로 여기 날씨를 샀다고 농을 쳤다. 놀랍게도 그 후 샤모니로 돌아갈 때까지 정말 날씨가 모두 좋았다. 딱 하루 눈이 내렸지만 그래서 더 환상적이었다. 정말 언니의 로또 덕에 날씨가 좋은 건지, 날씨 덕에 언니 기분이 좋아진 건지- 어찌됐든 언니의 멘탈 회복이 빨라 다행이었다.
다시 우리는 여느날처럼 풍경에 감탄하며, 혹은 짐무게에 툴툴대며 오늘의 목적지인 본옴므고개를 향했다. 큰 고비는 넘었으니 안심한 듯 우리는 우리만의 속도로 걸었고, 많은 트레커들이 우릴 추월했다. 꽤 긴 오르막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지만 첫날을 잘 넘겼기 때문에 겁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발머산장 앞에서 전투식량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본격 오르막을 올랐다. 그런데.
‘끝이 없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거친 돌오르막길을 열걸음씩 세어가며 꾸역꾸역 올라 드디어 본옴므 고개에 올랐는데 다시 언덕, 또 언덕. 알고보니 Col de la Bonhomme와 Col de La Croix du Bonhomme- 본옴므 고개가 두개였던 것.
이를 악물고 ‘이번엔 (오늘 묵을 산장이 있는) 두번째 본옴므고개가 나올거야!’하고 올라가면 또 다른 언덕이 있다. '본옴므 Bonhomme'란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라는데. 좋은 사람님, 나에게 대체 왜 이러시죠?
TMB에서 격하게 힘들다는 건, 풍경이 멋지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발머산장부터 나무는 자취를 감추고 빙하가 지나간 드라마틱한 계곡을 올라간다. 저멀리 조베호수도 보인다.(다녀오는 트레커들이 있지만 우리는 포기.) 첫번째 본옴므고개를 넘자마자 황량하지만 웅장한 산맥들이 도미노처럼 차곡차곡 끝이 없이 펼쳐진다. 저 아래에는 목이 긴 거대한 공룡 바로사우루스라도 살고 있을 것 같다. 폐가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순간에도 절벽으로 기어가 포즈를 취한다. 아마도 평생 다시 볼 수 없는 장면이라는 직감에.
빙하얼음 위를 걷거나, 손 반뼘만한 계단식 돌을 밟고 절벽계곡을 지나야 하는 등 길도 꽤 터프하다. 그렇게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 La Croix du Bonhomme, '좋은 사람의 십자가'에 도착했다. 커다란 돌무덤이 이 곳의 상징인 것 같았고, 십자가는 보이지 않았다. 돌무덤 뒤로는 오르막에서 본 광활한 도미노가 360도로 펼쳐져있고, 고개 한치앞에 산장 하나가 우두커니 서있다. 쥬라기 시대 어딘가에서 헤매다가 다시 21세기로 돌아온 듯 했다.
정신없어 보이지만 깨발랄한 매니저가 산장에 대해 신나게 안내를 해준다. 샤워실이 고장나 씻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고, 무사히 산장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놓였다. 꽤 높은 곳에 있는 산장답게 시원한 풍광을 자랑했다. 오후 하늘이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니 환상이다.
그렇게 기분좋게 짐을 풀고 긴장도 풀고 맥주를 한 잔, 아니 한 모금 했는데 -덜큰하니 무척 맛이 없었다- 그 순간 속이 미슥거리고 머리가 깨질듯 두통이 시작됐다. 곧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는데, 전식으로 나온 스프는 양파 끓인 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몇 숟가락 뜨지 못하고 상태가 더 심각해져서 방에 들어가 누워야 했다. 방은 방한이 전혀 안되서 냉장고같았는데, 이불 속에 핫팩을 터트려 끌어안고 눈을 붙였다.
3일째 나는 그렇게 뻗어버렸다.
'이거 큰일났다.' (실제: 이거 X됐다.)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언니가 앓아누워야 할 판에 내가 이러고 있다니...'
'이런 체력을 가지고 TMB에 무턱대고 도전하다니 내가 미쳤었나봐.'
밤새 온갖 생각을 하며 앓았다. 천만다행으로 핫팩은 작동을 잘했고 무리않고 바로 누워버린 덕분인지 다음날 아침 몸은 가뿐해져 있었다. 배가 고파서 좀비처럼 일어나 가방에 있던 육포, 초콜릿, 비타민 사탕을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는데 언니가 잠에서 깼다.
“언니, 나 살아났어!”
아마도 그날의 실신(?)은 일종의 경고였던 것 같다.
‘니 수준에 TMB라니. 끌끌. 굳이 왔으니 절대 무리말거라.’
네, 암요, 암요. 그렇게 TMB에서의 최대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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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뚜르드몽블랑 일주 트레킹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