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뚜르드몽블랑 일주(5) 레샤피우에서 엘리자베따산장
보통 숙소에서 저녁을 해결하는 TMB에서 숙소별 음식을 맛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3개국을 이동하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의 가정식에 가까운 식사를 경험할 수 있었고, 매일매일 디너를 기대하며 걸음에 더 힘을 냈다. 특히, 프랑스 본옴므 산장, 레샤피우 호텔 그리고 이탈리아 엘리자베따 산장으로 이어진 저녁식사는 드라마틱했다.
그저께 묵었던 본옴므산장은 워낙 접근이 어려운 곳에 있어 재료 공수가 어렵다는 점은 이해가 가지만... 그 해맑은 산장 매니저 청년은 노력대비 음식 솜씨가 안습이었다.(ㅠㅠ) 양파물에 가까웠던 스프, (뻗어버려 먹지 못했지만) 덩어리에 가까웠다는 마카로니치즈는 TMB 중 가장 형편없는 식사로 회자되며 여행 내내 웃음을 선사했다. (안타깝게도 요리는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다)
그 다음날 레샤피우 호텔에서의 저녁식사에 기대가 클 수 밖에 없었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차가 접근하지 못하는) 본옴므산장보다는 식재료가 풍성한데다, 가족이 운영하기 때문에 일반 레스토랑 메뉴가 아닌, 제대로된 프랑스 가정식 식사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었다. 디너 시간을 기다리는데 시간이 어찌나 더디게 가던지!
도로가 지나는 마을이라 TMB를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호텔에 묵은 덕에, 비수기인데도 디너는 북적북적했다. 아기자기한 하트 무늬 그릇을 포함한 정성스런 세팅부터 기분이 좋았다. 이 지역에서 만들었다는 놀랍도록 고소한 생버터를 맛보고 기대는 더욱 폭발했다. 첫요리는 호박스프였는데 다양한 향신료를 쓴 이색적인 맛에 두접시나 해치웠다. 두번째 요리는 크림 그라탕(?)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데, 부드럽고 담백해서 자꾸 손이 갔다.
이전까지 모두 스프- 본식-후식 3단계로 식사가 나왔어서, 이제 후식이 나오겠거니 하는데 세번째 요리는 고기스튜가 아닌가? 호텔 주인이 설명하기를 지금이 일년중 허가된 사냥 기간이라, 이때만 맛볼 수 있는 야생 사슴(deer) 고기로 만든 스튜라는 거다. 헐. 생전 처음으로 사슴고기를 맛보게 되는 순간이구나. 이런 경험을 해보다니!
스튜 국물은 와인베이스였는데 몇가지 향신료를 썼는지 가늠이 안될 정도로 복합적인 맛이 났다. 음, 독특하군, 하며 씹은 사슴 고기는 정말 부드럽고 부드러웠다. 그런데 문제는 심각한 누린내였다. 이상하게 오후부터 호텔 안에서 알 수 없는 냄새가 났었는데 이게 원인이었던 것이다. 양고기도 맛있게 잘 먹는 나로서도 적응하기 힘든 향기였다... 이후 치즈와 초코케잌까지 맛보았지만 사슴고기의 충격에 잘 기억이 안난다. 운나쁘게 잡혀 누린내만 남기고 허망하게 간 사슴의 눈망울이 어른거렸다. 그렇게 프랑스에서의 다소 ‘전위적’인 저녁 식사는 큰 임팩트를 남겼다.
다음날인 다섯번째 날은 드디어 국경을 넘어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날이다. TMB에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큰 고개를 넘는다는 말인데, 이 날은 세이뉴고개(Col de la Seigne, 2,530m)를 올라야 했다. 거리가 꽤 길어 일찍 길을 나섰고, 고개 초입의 모떼산장에서 캠핑을 한 장군이네를 만나 함께 고개를 올랐다. 역시 20대 장군이 누나와 일곱살 장군이는 쌩쌩한 체력을 자랑했고, 우리를 기다려주면서 함께 이탈리아에 입성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구분은 단순하고 작은 탑 하나가 다였다. 섬나라 아닌 섬나라에서 온 우리로선 신기할 따름이었다. 프랑스인지 이탈리아인지 모를 바닥에 주저앉아 레샤피우에서 싸온 점심도시락을 나눠먹었다. 이 남매는 왕성한 식욕도 꽤 닮았는데- 장군이 누나는 캠핑을 주로 해서 대부분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떼우는 것을 늘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날은 남매도 산장에서 묵으며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고, 다같이 이탈리아에서의 첫 식사를 기대하며 열심히 고개를 넘었다.
내리막을 지나니 분지 평원이 펼쳐졌다. 오후 네시에야 빙하계곡 옆 가파른 곳에 자리한 엘리자베따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은 적당히 아늑한 규모에 분위기는 활기찼다. 반려견은 내부 출입금지인 것이 아쉬웠지만 장군이를 작은 로비에 있을수 있도록 해주었다. 똑똑한 장군이는 다 이해한다는 듯 로비를 떠나지 않았다.
핫샤워를 하려면 산장에서 준 코인을 넣어야 하는데, 따뜻한 물이 단 3분 나왔다. 장군이 출입금지와 칼 같은 코인 핫샤워의 각박함에 약간 섭섭하려던 찰나, 저녁시간이 시작되었다.
지금껏 전식은 항상 스프였는데, 모짜렐라 치즈와 햄을 넣고 따뜻하게 구워낸 샌드위치가 가장 먼저 나오는 걸 보고 (국경을 지났을 때보다 더) 나라가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물론 맛있었다! 두번째로 나온 크림리조또는 간이 딱 맞았다. 세번째 요리는 돼지고기 스테이크에 볶은 야채와 감자를 곁들였는데, 식재료 그대로 볶기나 굽기만 했는데도 정말 맛있었다. 그동안 신선한 야채가 고팠는지 야채볶음을 특히 맛있게 먹었다. 마지막 생크림이 올려진 푸딩은 적당한 달콤함에 그자리에서 다섯개는 먹을 수 있는 맛이었다. 우린 다같이 외칠수 밖에 없었다.
“역시 이탈리아가 최고야!”
단 몇번의 식사를 두고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를 해보자면- 프랑스는 다소 실험적이고 독특하지만 좀 낯선 맛을 보여주었다.(사슴고기라니! 사슴고기라니이!) 이탈리아 요리들은 새롭지는 않지만 친숙해서, 아는 맛이 무섭다는 말을 실감했다. 이후 2박 3일간의 이탈리아 여정에서의 맛본 음식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체력적으로 힘들었던 TMB를 내 두번은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탈리아 산장에서의 저녁식사를 생각하면 슬슬 그리워진다. 아마도 매일 저녁이 그토록 귀하고 행복했던 건 TMB를 간신히 걷고나서였기 때문일 거다.
시장이 반찬. 트레킹에서 늘 통용되는 법칙이다.
#TMB다섯번째날 #레샤피우_엘리자베따 #이탈리아입성 #먹기위해_걷는다
2018 뚜르드몽블랑 일주 트레킹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