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뚜르드몽블랑 일주(6) 엘리자베따산장에서 꾸르마예르
사람들은 TMB에서 샤모니와 같은 도시에 머무르며 일일 하이킹으로 주변 코스를 다녀오기도 하고, 우리처럼 산군을 일주하기도 한다. 뭐가 더 낫다고 할수는 없다. 단, 일일 하이킹을 하면 매일매일 산을 올라갔다 내려와야 하고 일주는 높은 곳에 있는 산장에서 다른 산장으로 가는 것이니 오르내리기를 덜해도 된다. 일주를 선택한 건 이런 이유도 있었던 것(ㅎ). 일주 약 10~12일 동안 대부분 끝내주는 전망의 산장에 머무르게 된다.
여행의 딱 절반, 5,6일차 즈음 -좋은 그림도 계속되면 그게 그거 같을 때- TMB의 길은 샤모니에 이어 두번째 큰 도시인 이탈리아의 꾸르마예르Courmayeur로 이어진다. 고향이라고 하면 도시의 모습을 떠올리는 나같은 사람에겐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오늘도 역시 코발트블루의 하늘색을 자랑하는 날씨다. 산장에서 얼마 안가 거울같은 호수에 설산이 비치는 장면이 나타났다. 계속되는 이 퍼펙트한 날씨를 사다준(둘째날 후기 참조) 동행 언니는 오늘 또 한번 용한 촉을 발휘했다. 내가 지도를 보고는 왼쪽 언덕에 예쁜 호수가 있을 것 같다며 잠깐 보고 가자는 제안을 했는데 언니가 쿨하게 거절했다. 꾸르마예르로 가는 오른쪽 오르막으로 오르면서 그 언덕 위가 보였는데, 호수는 커녕 돌무덤만 있었다. 역시! 언니 말만 듣겠습니다요!
오르막을 올라 능선을 걸어간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아닌 능선길은 풍경을 오롯이 즐기라는 몽블랑이 주는 선물같은 것이다. 설산을 향한 매우 올가닉(?)한 나무 망원경들을 포함한 트레커들을 위한 어설픈 설치물들도 왠지 귀여웠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준비해봤어’ 그런 느낌?
그런데, 뜨거운 햇빛이 조금 괴롭다. 신나서 달리다시피 하던 장군이도 헥헥거리기 시작하더니 그늘이 나오자 풀썩 누워버렸다. 자주 쉬면서 가는 수 밖에.
능선길의 끝에 있는 산장인 메종비에유 Maison Vieille에 도착하면 여기서 꾸르마예르로 가는 내리막이 시작된다. 그 전에 여기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역시 비수기에 산장의 레스토랑은 공사중.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 실망도 없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널찍한 언덕 한 구석에서 점심을 직접 준비했다.
여느 날과 같이 장군이 누나는 전투식량 비빔밥, 우리는 알파미, 블럭국, 멸치 반찬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엘리자베따 산장에서 챙긴 버터가 신의 한수였다. 알파미에 버터를 넣었더니 그 팍팍했던 밥에 풍미가 돈다! 아, 왜 이걸 이제야 알게 된거야?!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던 점심이었다.
메종비에유에서 꾸르마예르는 지척에 보이는데, 그 높이는 꽤 된다(고도 730m 차이). 성수기에는 리프트를 운영해서 편하게 내려간다고 하는데, 당연히 지금은 멈춰 있다. 겨울엔 스키장이 되는 곳이니 경사의 각도는 상상에 맡긴다. 무릎만 조심하며 살살 내려가자. 우리는 무사히 내려가서 블로그에서 찾은 맛집에서 본투비 이태리피자를 먹을 것이다.
없던 힘이 솟아난다!
역시나, 늘 그랬듯 몽블랑은 예상보다 강했다. 끝도없이 이어진 숲속 내리막길을 급한 경사에 거의 옆으로 자란 나무 뿌리를 밟아가며 지그재그로 내려가야 했다. 게다가 오후들어 날은 더 더워졌고 흙먼지는 풀풀 날렸고 무릎은 감각이 없고- 거의 두시간동안 계속되는 내리막에 일행은 점점 더 대화가 줄어들고 탄식하는 소리만 오갔다. 장군이를 비롯해 넷 모두가 기진맥진했지만 지체할수록 더 힘들어진다는 걸 알고 있기에 멈출수도 없었다. 아, 이럴수록 곧 먹을 이태리피자를 생각하자.
드디어, 절벽처럼 느껴졌던 경사는 평평해졌다! -정상을 오른 듯한 감격- 그리고 예쁜 집들이 나타나더니 오랜만에 건물들 사이의 길을 걷는다.
그렇다, 도시다!
광장과, 레스토랑과, 카페와 슈퍼마켓이 있는 곳-
까르푸에 들어가니 갑자기 눈이 반짝인다. 냉장고와 매대를 채우고 있는 상품, 상품들! 언제든 손뻗으면 있을 것 같았던 너희들이 며칠간 참 그리웠단다… 잠시 감상에 빠졌다가, 다음날을 위한 점심거리와 과일을 욕심껏 집어담았다.
우리는 미리 호텔을 예약했고, 장군이네는 광장 근처 호스텔에 묵기로 해서 저녁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몇개월전 대충 느낌대로 잡은 호텔은 중심가에서 한참 떨어져있었다(…) 방금 까르푸에서 행복하게 담은 물건들은 왜이리 무겁지? 지도를 보지 않고 예약한 스스로를 원망하며, 한시간같은 15분을 걸어 호텔에 도착했다.
그런데 웬걸, 150년된 건물을 느낌있게 개조한 호텔이라니! 특히 오래된 벽난로가 있는 방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주인의 친절함과 그 다음날 정성스러운 아침은 최고였다.
그래, 왠지 끌리더라니까!
꿀맛같은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으러 중심가로 나갔다. 꾸르마예르는 중심가라고 할수 있는 거리가 걸어서 오분이면 끝나는 작은 도시였다. 그럼에도 며칠동안 도시 구경을 못한 우리로서는 예쁜 조명이 켜지기 시작한 아기자기한 이 거리가 뉴욕 타임스퀘어처럼 느껴졌다.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약속에 5분 늦고야 말았다.
유명하다는 피자집은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생각해보니 여행와서 첫 외식이다. 뻗어버린 장군이를 두고 온 장군이누나도 처음이란다. 너무나 신난 나머지 세 명이서 (라지)피자 세개를 주문했다.
맛이 어땠냐고? 이탈리아인데, 말해 무엇하리!
세 피자 중에 디아블로라는 이름의 피자가 그렇게 맵지 않았다면, 한국여자 셋이 테이블만한 피자 세개를 30분만에 남김없이 먹어치운 기록을 세웠을 것이다. 이 동네 신문 정도에 실릴 만 하지 않았을까?
이탈리아 피자를 먹고난 후엔 젤라또를 먹어줘야하는데- 2차로 젤라또가게를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문을 닫았다. 작은 유럽 도시답게 9시쯤 되니 문을 연 곳이 드물었다. 아쉬웠지만 불켜진 꾸르마예르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내가 이렇게 도시를 좋아했었나?
산이 좋아 이곳까지 와서 트레킹을 하고 있지만- 나의 본질은 도시의 편안함이 익숙한 보통의 도시사람임을 인정할수 밖에 없었다. 제대로 아는 나무 이름은 없지만 맥주 브랜드는 줄줄 욀 수 있는 문명의 노예. 이런 나에게 TMB가 어울리는 것일까?
...이내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손사레를 친다.
여행자에겐 모든 일들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매일매일 풍경도 바뀌고 내 마음도 바뀐다. 어울리고 말고는 전혀 중요치 않다. 어차피 난 이방인이니까.
어쩌면 이런 나이기 때문에 더 저 설산 풍경에 압도당할수 있다. 여행을 하고 돌아가면 내가 사는 도시를 좀 더 좋아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일지 모른다.
아, 내일은 무려 몽블랑 코스의 하이라이트라는 그랑조라스 능선이다. 이 여행의 반을 딱 채운 날, 더 지치지 않고 남은 반을 기대하고 있음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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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뚜르드몽블랑 일주 트레킹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