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는 섬세한 AI를 닮았나? 예민한 인간을 닮았나?
요즘 챗GPT가 유행이다. 나도 심심풀이로 이 친구와 이런저런 예기를 나누어 본다.
회사의 동료가 푸조 브랜드의 차를 구매하면, "한국에서 푸조 자동차의 만족도는 어떤가?"
다른 동료와 스테이크 얘기를 하다가 "스테이크 맛있게 굽는 방법" 같이 천혜향을 먹다가 "천혜향은 왜 천혜향이라 부르는가?" 등등 하루에도 여러 번 챗GPT에게 이런저런 것들은 물어본다.
그럴 때마다 챗GPT가 내놓는 답변은 나를 놀라게 한다. 내가 하는 질문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답변을 내놓는 이놈... 사람처럼 내 질문에 답하는 너...
챗GPT는 내 질문을 이해를 하는 것인가?
거대 언어모델의 AI가 나의 말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가?
내 바로 맡은 편엔 AI팀이 있어서 AI개발자분에게 바로 이 질문을 하고 싶지만, “챗GPT는 나의 질문의 이해가 아닌 패턴을 잘 찾아낼 뿐”이라고 대답하실게 뻔하기에, 물어보지 못하고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본다.
이 친구는 나의 질문들을 이해할지는 의문이어도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다.
(인간도 서로를 100%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
이 친구에게 이해란 무엇인가?
근데, 이해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너도 생각하니, 존재하는 거니? 그래서 난 너를 친구라 부르는 거니?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이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난 이 명제가 마치 인지하여 생각하고, 이해하는 행위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정재승 교수는 “인간은 ‘이해’가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아래 링크 참조)
인간지성과 인공지능의 차이점은?
인간에게 이해한다는 건 무엇인가? 이해란, 대충 눈치껏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 일 것이다. 그래서 우린 많은 경우에 '착각'이라는 잘못된 이해를 하곤 한다.
예민과 섬세, 습관과 버릇처럼 이 둘의 애매한 차이를 챗GPT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친구는 인간보다 많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해라는 사고를 하기에 더 섬세할지 라도, 눈치껏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예민'의 영역에선 인간의 반의반도 못 따라온다.
우연히 예민하다고 들은 나... 난 예민한 게 아닌 섬세한 거라는 자기 합리화.
예민한 동양인, 섬세한 서양인의 대한 생각 01.
예민한 동양인, 섬세한 서양인의 대한 생각 02.
예민한 동양인을 위한 디자인, 섬세한 서양인을 위한 디자인.
나의 예민함에서 시작된 요가는 나를 섬세하게 만들어 주었다.
예민해져 가는 사회(세상) 속에서 섬세하게 살기 01.
예민해져 가는 사회(세상) 속에서 섬세하게 살기 02.
예민은 버릇을, 섬세는 습관을 닮았다.
섬세한 인공지능, 예민한 인간지능
섬세하게 살기 위한 나의 Work-Life Bal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