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하게 살기 위한 나의 Work-Life Balance
[7] 예민한데, 섬세한 꽃. 의 글에서 섬세한 꽃처럼 살기 위해선,
난 지식과 경험을 쌓기, 자기 성찰하기, 다른 사람의 의견 수렴하기, 논리적 사고하기,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휴식을 취하기 등이 필요하다 말하였다.
난 그중 적절한 휴식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집중력과 창의성을 높이기. 가 나에게 제일 필요하다고 믿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 난 이 말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한다. 효율적인 뇌 활동을 위한 충분한 잠을 자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라고 생각한다.
일찍 일어나서 예민한 뇌로 사는 것보다, 충분히 잠을 자고 일어나서 섬세하게 생각할 수 있는 뇌로 사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30126021001
어쩌다 보니, 난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건축회사에서 설계일을 하시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쩌다가, 10살 무렵에 "전국 어린이 사생대회"에 나가서 은상을 받았고...
그렇게 암묵적으로 우리 집에서 난 미술을 할 아이로 정해졌다.. 그렇게 공부는 좀 못해도 되는 아이, 어차피 미대 갈 아이.. 이렇게 난 한가족이지만 동생과 다른 공부 압박을, 아니, 공부압박 없는 유년시절을 보냈고, 미술은 큰 노력 없이도 그냥저냥 중간이상을 했다.
그렇게 큰 노력 없이 적당히 하는 10대를 보내고, 난 20대에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랭귀지학교를 거처 Art&Design College, 디자인 전공 University까지... 영어가 부족했던 난 컬리지에서 아싸 중에 아싸였으며, 그냥 존재감 없는 한국인이었다. 난 그들의 Playground 안에 들어가려면, 과제나 작업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걸 깨닫고, 작업과 스터디에 온 에너지를 쏟았다. 그때 난 내가 하는 작업에 몰입이란 경험을 하게 되고, 작업과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의 시너지는 엄청남을 경험했다. 결과물의 만족도와 나의 무한 능력(아마도 능력은 총량의 법칙이 있는 건지, 초반에 끌어 쓴 능력은 점점 줄어들어만 갔다...)을 경험하게 되고, 학교에서도 인정을 받으며, 난 그걸 즐기게 되었다. 아마 나의 워커홀릭의 시작은 이렇게였던 거 같다.
나의 유학생활은 정말 뼛속까지 치가 떨리는 외로움의 나날이었다. 혼자 있어서의 외로움이 아닌... 어디에 속하지 못하는 본질적인 외로움... 그런 생활에서 무언가에 미쳐서 몰입하고, 바쁘다는 것은 나의 도파민을 자극하여, 마치 모두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해 주었고, 바쁘거나 몰입의 순간엔 외로움이란 감정도 못 느꼈고, 난 점점 그것에 중독되었던 거 같다.
외로움 + 외로움 = 창의력+창의력, 이건 나의 불문공식이었고, 그렇게 스스로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정말이지, 외로운 나에게 외로움 한 스푼을 더해 줄 때마다, 내 과제나 작업물의 결과는 +10점씩 늘었다.
그렇게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 지독한 Workaholic으로 살았다.
그때는 일이 내 삶의 최대 행복이라 생각했고, 일하는 것에 제일 큰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장수이 씨의 후손이다. 어질 적엔 큰아버지께서 족보책을 보여주며, xxx파 xx세손이 어쩌고 저쩌고 하시며 매해 교육해 주셨지만, 난 지금 큰아버지께서 그렇게 강조하며, 교육해 주셨던, 족보수업은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 단 한 가지, 이중섭 화가가 5,6촌의 윗사람이라는 거밖에... 이중섭 화가를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나의 운명에 큰 영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수 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셨다. 미대에 가고 싶으셨지만, 가족들의 심한 반대로 건축설계 쪽으로 진학하셨고, 평생 그 일을 하셨다. (설계가 그나마 그림 그리는 일과 비슷해서 진로를 그렇게 정하셨다고 하셨고, 난 아버지 가족들이 반대한 이유가 이중섭화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이지만, 가족들에겐 그림이 좋아서 가족을 버린? 등한시한 사람... 이니까..)
졸업 후 난 한국에 왔고, 취직을 하려고 취업사이트를 뒤져보아도 맘에 드는 회사가 없었다.
난 대기업이나 스펙에 맞춘 회사보다 그냥 느낌적으로 가고 싶은 회사?를 찾았고, 웹서핑 중 우연히 가고 싶은 회사를 찾았다. 그 회사는 디자이너는 채용 중이지도 않았지만, 난 무작정 찾아가 대표를 만났고,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나의 똘기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난 그렇게 거기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집과 회사와의 거리는 따져보지도, 1:30분씩의 출퇴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모른 체, 시작된 나의 직장생활... 나에게 일이란 노동 이상의 것이라 믿었다. 일은 나의 삶에 도움을 주면서 쾌락과 그 이상의 가치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매일 자발적 야근은 늘었고, 1시간 반 퇴근길을 허비하여, 다음날 다시 1시간 반 출근길을 허비하는 시간도 체력도 아까워, 회사 사무실 한 편의 소파에서 자곤 했다. 30대의 난 그렇게 스스로를 태우고 있었다.
그랬던 난 어떻게 워커홀릭이 되어 10여 년을 살았고, 지난 몇 년은 Workaholic이 아닌, Work-Life Balance를 찾으려고 노력 중인가?
Work-Life Balance는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많은 회사들이 워라밸을 중요시하는 MZ들을 위해 재택근무, 유연근무제, 육아휴직, 복지제도, 교육지원등의 워라벨 제도 또는 복지를 만들고 있다. 나 또한 이전 회사에서 6개월 넘게 풀재택근무를 하기도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재택근무는 근무시간과 개인시간의 분리를 더욱더 모호하게 만들었고, 근무공간과 개인공간까지 하나로 만들어 버렸다. 난 출퇴근이 없는 편리함에 빠져 그 모호한 워라벨을 위한 재택근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였다. 결국 난 재택근무가 퇴사에 큰 영향을 주어 이직을 했다.
워라벨, 이것을 위해 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업무와 개인의 분리... 결국 난 2개의 Persona(정체성, 인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지금의 나의 삶에 만족하지만,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 남들도 다 이렇게 살겠지..? 라며 위안을 삼기도 한다.
"You become what you believe"
"당신이 믿는 대로 당신이 되게 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믿음에 따라 자신이 이룰 수 있는 것이 결정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명언 중에 하나이다.
이 명언은 나의 믿음이 나의 행동과 성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일을 성공적으로 이룰 가능성이 높아지고, 반대로 자신이 무능하다고 믿는다면, 그 일을 성공할 가능성이 적어진다.
여기서의 성공은 나에겐 섬세한 어른되기이다.
나의 예민과 섬세는 나의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 믿으면 섬세해질 수 있다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1편부터 10편까지 모두 읽으신 분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그럴 가치가 있는 글도 아닌 걸 안다.
그래도 난 이렇게 1주간 10개의 글을 쓰면서, 나의 길 잃고 헤매는 의식을 쫓아 최선을 다해 글로 정리해 보았다. 다음엔 어떤 주제로 어떤 글을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기승전결 없는 저의 글 읽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
우연히 예민하다고 들은 나... 난 예민한 게 아닌 섬세한 거라는 자기 합리화.
예민한 동양인, 섬세한 서양인의 대한 생각 01.
예민한 동양인, 섬세한 서양인의 대한 생각 02.
예민한 동양인을 위한 디자인, 섬세한 서양인을 위한 디자인.
나의 예민함에서 시작된 요가는 나를 섬세하게 만들어 주었다.
예민해져 가는 사회(세상) 속에서 섬세하게 살기 01.
예민해져 가는 사회(세상) 속에서 섬세하게 살기 02.
예민은 버릇을, 섬세는 습관을 닮았다.
섬세한 인공지능, 예민한 인간지능
섬세하게 살기 위한 나의 Work-Life Bal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