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 나는 것들을 서로 존중하고 서로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유토피아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아도르노)
‘차이와 모순’에 관한 표현에서 아도르노의 것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을까.
오직 문제는 ‘모순의 바다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에 있다고 여긴다.
아도르노의 표현에서 이목을 끄는 것은 아도르노가 ‘유토피아’를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아도르노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면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도르노가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이목을 끄는 것이다.
만일, 아도르노가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를 염두에 두지 않고 단지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이미 헤겔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립물의 통일의 상태인 ‘모순의 바다’에서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면 그뿐 아닌가. 그렇게 ‘주인과 노예의 변증’으로서 상호 전도의 상태를 반복하면 그뿐 아닌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현실을 ‘모순의 바다’ 그 자체로 인식하는 이들에게, 차이에 대한 존중이나 사랑의 상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일 수밖에 없다. 오직, 주인이 되기 위한 생사를 건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사고를 가진 이들에게 차이를 존중하며 사랑하는 상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지, 주인과 노예가 없는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상태가 목적이 아닌 것이다.
한편으로, 현실에 ‘모순의 바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오직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도 차이에 대한 존중이나 사랑의 상태와 같은 유토피아는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엄연히 현재 하는 ‘모순의 바다’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그 ‘모순의 바다’를 건너지 않고는 유토피아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모순의 바다’를 상정하는 아도르노의 현실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겠다면 현실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아래의 글에서는 ‘모순의 바다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