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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옫아 Jul 18. 2023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우리나라의 오드아이

내가 나라서,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나라서 마주했던 기억들이 있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 제가 연재할 제 실제 이야기들입니다.

본 글은 오드아이로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기 위해 쓰여진 글들 중 열세 번째 편에 해당합니다.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내 친구 민달팽이2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내 친구 민달팽이1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방어책과 직진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아, 맞다 내 눈!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나의 연두색에게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나를 알아주는 사람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글을 쓸래요, 난.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근데 그게 뭐라고?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안녕, 오드아이.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다른 눈으로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같음과 다름의 사이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나의 일부이자 전부 (brunch.co.kr)





내가 나라서, 고작 이것밖에 될 수 없는 나였던 순간들이 있다.


우리나라,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오드아이로 살아가는 게 그리 쉽지 않다고 느꼈던 이유는 단언컨대 ‘희귀성’ 때문이다.

물론 오드아이라는 특성 자체가 동물이 아닌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게 그리 흔하지도 않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오드아이 사람의 경우는 정말 드물다.

미운 오리 새끼가 이런 마음이었을까, 동족 없이 나홀로 내가 오드아이임을 버텨내야 한다는 게 외로웠다.

특히 우리 가족들 중에서도 내 왼쪽 눈과 같이 다른 색인 사람이 없다는 점도 꽤나 서글펐다.

내 눈 색이 양쪽 모두 같았으면 좋았겠다, 아니 좋다기 보다는 얼마나 편했을까, 이뤄지지 않을 상상들만 자주 펼쳐보곤 했다.


이번 글은 내가 연재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오드아이로 살아남기’ 중에서 가장 아픈 조각들이 모아진 글이다. 나는 기꺼이 고백하고, 그 순간들에 머문 나의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서 쓰게 되었다.

물론 부끄러워서 글을 발행함과 동시에 바로 보여줄 순 없겠지만, 언젠간 내 브런치에 와서 이 글을 보게 된다면 ….


내가 나라서,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나라서 마주했던 기억들이 있다.


아프고 아픈 상처들이야 일상 곳곳에서 끈적하게 남았지만 그래도 유독 날카롭게 베인 상처처럼 그 흉터가 오래갔던 기억은 총 3가지이다.


첫 번째, 어렸을 적 엄마와의 다툼에서 난 늘 내 상처를 무기로 꺼내서 휘둘렀다는 것.

사춘기 소녀가 그러하듯, 엄마와의 다툼 속 주제는 ‘오드아이’가 아니더라도 상당히 다양하게 많았다.

하지만 우리의 싸움은 기승전’오드아이’로 마무리되곤 했다. 엄마의 가장 아픈 상처일 수 있는 내 오드아이를 무기 삼아 엄마를 아프게 했다. 그래서 우리의 싸움은 오드아이와 크게 상관없던 주제였을지라도, 나는 ‘왜 나를 오드아이로 낳았어?’혹은 ‘왜 내 눈 색을 다르게 낳았어?’를 남발하며 서로 상처만 남긴 채로 다툼이 종결되곤 했다.

엄마와의 다툼 속에서 왜 그리 이기고 싶어했을까, 왜 하필 엄마와 내 상처를 나는 미치도록 휘둘렀을까. 너무 어렸던 시절에 고작 내가 했던 선택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이 많이도 부끄럽다. 그때의 나는 잔뜩 날 선 고슴도치와 다를 게 없었던 것 같다. 순진하게 악랄했던, 그래서 엄마와의 다툼에서 엄마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던 그 시절이 부끄럽고 또 다른 상처로 남아 있다. 엄마가 나를 이렇게 태어나게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때 누구라도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이에 기꺼이 그 역할을 맡아준 엄마, 그땐 정말 미안했어요. 엄마의 탓도 내 탓도 아닌 그냥 나는 그저 오드아이라는 걸 이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나보다 5살 어린 내 유일무이한 동생에게 나의 상처를 보라고 강요했던 것.

내겐 나보다 5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어린 시절 동생을 많이 괴롭히고 장난치고 함께 놀면서 커왔는데, 어린 시절 나에게도 궁금했던 건 ‘동생 눈에도 내 눈 색이 이질적으로 보일까?’ 라는 것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누나의 눈 색이 양쪽 달라서 무섭진 않을까. 어린 시절 나를 놀렸던 아이들처럼 내 남동생도 사실 내 눈 색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진 않을까. 그러나 굳이 입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건, 차마 물어보고 확인받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커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떠한 이유에선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오드아이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도로 예민해졌을 때 유치원생이던 동생을 붙잡고 결국 물어보았다. 내 눈 색 어때? 네가 보기엔 어때? 이상해? 내 눈 색이 그렇게 달라? 하고. 놀란 동생은 아무 말 없이 벙쪄서 나를 뚫어져라 보다가, 딱 한 마디를 했다. 아니, 누나 눈 색 똑같은데, 라고.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을 하는 남동생을 보니, 미안한 감정이 밀려와서 마땅한 대답도 못한 채, 멍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엄마에게 “엄마, 00이가 그러는데, 00이는 내 두 눈 색이 똑같대.”라고 이야기하고 방에서 혼자 울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남동생이 내 방에 들어왔던 것 같기도 하고 ….

마음씨 착했던 동생은 그때 이후로도 벌써 25살이 되는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내 눈 색에 대해서 운운하지 않는다. 다만 종종 같이 라면이나 야식을 먹다가, 내가 ‘나 오드아이 대표로 유퀴즈 나갈 거야’라고 하면, ‘누나 그런 걸로 유퀴즈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대꾸하며 상금을 자기한테도 줄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게 전부.


마지막으로 중학교 시절, 내게 렌즈 끼고 왔으니 운동장을 돌라고 시키는 교사(선생님이 맞는 표현이지만, 얄미운 마음에 교사라고 지칭하겠습니다)의 말에 대꾸 하나 못했던 내 모습.

사실 너무 상처여서 기억에서 거의 지워버린 기억이라 정말 그런 일이 존재했는지조차 어렴풋이 떠오르는 잔상 같은 조각.

초등학생 때는 종종 오드아이를 숨기기 위해서 오드아이인 한 쪽에 검은 색 렌즈를 착용했지만, 중학생 때는 여권 사진 촬영 같은 일이 없으면 아예 렌즈 없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교사가 나를 부르더니 학생이 무슨 렌즈를 한 쪽만 끼고 다니냐며 다그쳤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복장 규율이 엄격했던 여자중학교로, 당시 귀밑 3~5CM 규정이 있을 정도였으니, 학생이 렌즈를 끼고 다니는 걸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교사였을 것이다. 선생님, 오드아이 처음 보세요? 대한민국 오드아이 처음 보시냐고요? 라고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벌칙으로 운동장을 돌았다. 짜증이 솟구쳤지만 내 존재에 대해, 내 눈에 대해서 교사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약점이나 비밀을 밝히는 것 같을까봐. 그냥 운동장 돌지 뭐, 싶었지만….

뒤돌아 보니 그 기억이 시린 기억으로 남았다. 운동장을 돌았다는 게 상처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나에 대해서 어떤 대꾸도 못했던 내 스스로가 나에게 큰 상처였다. 나를 지켜주고 나를 긍정해줄 사람은 나 하나인데, 그거 겨우 못하니, 스스로를 추궁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그런 일’이 아니었음을 사실 알고 있다.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내가 나라서, 내가 오드아이라서 더 말하기 어려웠던 ‘겨우 그런 일’.


아픈 세 조각들은 여전히 드문드문 기억이 난다. 애써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을 순간들.

내가 나라서 누군가에 상처를 주고, 다시 상처를 받고 그런 악순환의 연속이었던 기억들.

나는 이제 그때로부터 꽤 멀리 나아갔지만, 여전히 발목을 이내 잡혀버렸던 순간들.

그래서 여전히 극복하고 나아가려고 하는 나의 아픈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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