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눈이라는 워딩이 한때 내게 주었던 무게감에 대해.
이 이야기는 앞으로 제가 연재할 제 실제 이야기들입니다.
본 글은 오드아이로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기 위해 쓰여진 글들 중 열다섯 번째 편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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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눈. 이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표현이었다.
오드아이의 특성 자체가 눈 색이 다른 건(정확히 표현하면 양 홍채의 색이 다른 경우라 표현하기도 한다)데, 이를 ‘짝눈’이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만 놓고 본다면 잘못된 게 없다. 그리고 사실 짝눈이라는 의미 자체가 눈 색깔이 다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짝눈은 양 쪽 눈 크키나 위치가 차이나는 경우를 칭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쌍커풀이 한 쪽은 있고 한 쪽은 없는 걸 짝눈이라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최근에는 짝눈 연예인의 매력이 많이 부각됨에 따라 짝눈이라는 워딩 자체가 부정적으로만 쓰이진 않는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는 짝눈이라는 표현을 정말 싫어했다. 오드아이를 더 거칠게 표현한다는 느낌도 받았고. ‘양 쪽 눈은 같아야 한다’는 일종의 고정관념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어서(그래서 오드아이인 내 자신을 내가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런지, 짝눈이라는 표현을 들으면 무언가 불편하고 어려웠다. 정해진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는 경고 같이 들렸을 정도로, ‘짝눈’이라는 표현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그 표현을 오드아이인 나한테 직접 하지 않더라도, 그저 그 단어만 보면 거북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싫어하고 어려워했던 표현인데. 그래서 나는 한때 이 표현이 오드아이를 멸시하려는 의도가 있는 단어는 아닌 건지 고민했을 정도로 경계심이 높았는데. 때문에 나 역시 누군가를 부르거나 지칭할 때, 혹시 그에게 내가 하는 말이 마치 내가 짝눈이라고 들었을 때의 충격감과 비슷하지는 않을지 고심하곤 했는데. 어느 날, 그 짝눈의 무게감이 확 다르게 느껴진 순간이 있었다.
운전을 하고 어딘가로 가던 도중, 빨간 신호에 맞춰서 잠시 정차 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앞 차를 봤는데 해당 차의 브레이크 등 한 쪽이 나가서, 한 쪽만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그 순간 나는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어, 짝눈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매우 놀랐고, 이 단어를 내가 쓴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니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 들어와서 이 단어를 꺼낸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가 무심결에 이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에 대해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헐”이라고 외치며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생각하며 멍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짝눈이 가진 무게감으로부터 살짝 풀려난 것에 안도했다. 이제 이 단어를 마주하더라도 예전과 다른 무게감으로 대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짝눈이라는 단어 자체는 양 쪽 눈이 다르다는 의미를 전달할 뿐이지, 그 어떠한 의도도 없을 수 있다. 다만 내 입장에서는 나조차 어려워하는 내 오드아이를 누군가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 특징을 직설적으로 짚는다는 게 불편하고 싫었다. 그러니까 나의 상처를 누군가가 가볍게 부른다는 게. 어떠한 고민도 없이 언급한다는 게 싫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인정은 해야 할 것 같다. 오드아이는 짝눈이니까!
또 내가 짝눈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려움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났다는 게 신기했다. 괜찮네, 어렵지 않네, 그럴 수 있지! 가 주는 힘이랄까. 예전과 달리 짝눈이라는 단어를 듣거나 보아도, 더 이상 흠칫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작은 안도감도 찾아왔다. 이렇게 또 하나의 고비를 잘 넘겼다는 생각. 내가 나인 이유로, 나만이 겪는 어려움들이 있는데, 그 하나를 우연치 않게 넘어버렸네!
여기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 선천적인 자연 오드아이로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어느덧 15번째 쓰게 되었다. 종종 어떤 소재로 글을 써야 하나 싶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망설일 때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본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의도도 없이 그저 내가 겪었던, 내가 마주했던 순간들을 쭉 글로 쓰게 된다. 오드아이가 한때 대단한 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러니까, 위대하다는 게 아닌 대단한 상처라고 생각했던 거다. 나만 겪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주는. 그리고 내가 무얼 잘하거나 못해서 받은 게 아닌 그저 내게 와버린 나의 상처. 이를 어떻게 안고 가야 하는 건지 고민했던 지난 시간들을 쓰면서 나를 돌아보면 되는 거였다, 오드아이에 대한 글은.
그리고 한 편으로는 또 전하고 싶다. 저라는 사람은 이런 상처로 힘들어했는데 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겨 내기도 하네요. 제 경험이 당신에게 닿아서 작은 도움이나 참고자료라도 될 수 있을까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