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들
11월에 읽은 책들입니다. 간단히 정리해 봤습니다.
10월 : 2024 10월 결산
정해연 <홍학의 자리>
하도 반전의 반전의 반전이 일품이라는 평이 많아서 읽어본 인기 스릴러. 영화로 만들어내도 꽤 그림이 잘 나올 것 같다. 정해연 작가의 책은 처음인데 ‘놀라운 페이지터너’라는 평과 같이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끝까지 다 읽어 내려갔다.
아무리 현실이 답답하고 재미없어도 제자와의 일탈로 그 상황을 잠깐 모면하려는 시도는 결국 파국을 부른다. 그 파국을 덮기 위해 또 다른 희생자가 등장하고 결국 여기 등장한 인물들은 모두 파국을 맞는다.
경찰의 수사망은 절대 피할 수 없다. 현대 수사기법 하에서 완전범죄란 정말 나오기 힘들지 않을까? 경찰이 눈감아주지 않는 이상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범인도 잡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게…혼자…슉 뛰어서 휙 매달고…그게 가능한가? 대단한 근력이다…읍읍읍…(스포 때문에 말잇못)
이나가키 히데히로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아이 읽히려고 빌려왔는데 잠깐 펴서 보니 재미있어서 내가 다 읽어버렸다. 감자, 토마토, 후추, 고추, 양파, 차, 사탕수수, 목화, 벼, 밀, 콩, 옥수수, 튤립에 얽힌 이야기들을 흥미 위주로 정리했다.
저자는 일본의 식물학자이다. 일본의 책은 소설 말고는 잘 손이 안 가는데, '세계 3대 어쩌구 어쩌구' 식의 흥미 위주의 단정지음이 별로 마음이 안 들어서이다. (그리고 틀린 정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검증 없이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는 저런 식의 접근으로 문을 열어주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작물 순위는 옥수수, 밀, 벼, 감자, 대두, 토마토 순이라고 한다. 주요 작물인 옥수수, 밀, 쌀은 '세계 3대 곡물'로도 불린다. - 이와 같이 출처도 없고 그냥 아무 데나 '세계 3대'를 가져다 붙이는 꼬락서니 말이다.
이런 정보들을 잘 걸러내서 본인에게 필요한 것만 습득하는 힘을 잘 길러줘야 할 텐데...
대릴 지오프리 <설탕 중독>
알겠는데요 선생님… 그냥 저는 버리고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정해연 <용의자들>
<홍학의 자리>의 자기복제. 차이라고 한다면 <홍학의 자리>는 독자의 생각과 눈을 속여서 반전을 만들어냈고, <용의자들>은 반전을 조금만 넣고 온갖 불쾌한 인간 군상들의 추한 이면을 들여다보길 독자에게 강요한다.
죽어 마땅한 악인은 온갖 집요한 수사와 알리바이와 우연의 그물을 요리조리 피해나가고,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는 희생양들을 서두에 던져놓고 책 내내 잘근잘근 씹어서 너덜거리게 만들어놓고는, 마지막에 어떻게든 사건을 해결해 놓지만 찝찝한 마음은 독자의 몫이다.
조예은 <적산가옥의 유령>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의 조예은 작가의 소설. 군산의 한 적산가옥 근처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첫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조상님(이라기엔 고작 증조할머니지만)이 쌓은 덕이 증손녀를 구해주는 이야기. 일제강점기 한 적산가옥에 살게 된 부자의 비밀을 알게 된 증조할머니의 이야기가 어떻게 증손녀에게까지 이어지는지 약간의 판타지적 요소가 첨가되어 전개된다.
이래서 죄짓고 살지 말아야 한다는 건가…
제임스 맥브라이드 <하늘과 땅 식료품점>
1930년대 펜실베이니아 어느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사회에 만연한(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없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강화되는 듯한) 인종차별 및 이민자 혐오를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유색인종과 유대인 이민자들의 이야기.
모두에게 다정한 유대인 여인의 이야기와 억울하게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감된 흑인 소년을 구출하는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져 흘러간다. 미국인이라면, 유대인이나 유색인종이라면 더 많이 공감하고 재미를 느꼈을 만한 내용이다.
다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이 이 책을 읽고 재미있다고 말하는 건 엄청난 국제감각을 지녔거나 공감능력이 아주 높거나 평소 소설을 안 읽는 사람 아닐까? 난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김애란, 김연수, 윤성희, 은희경, 편혜영 <음악소설집>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요즘 영화로 개봉되어 원작도 다시 화제가 됐는지 도서관에 이달의 책 같은 걸로 선정되어 있길래 집어 들었다. 장강명 작가님도 내가 본 것만 두 번이나 우리 지역 도서관에 강연을 오시기도 했고.
2015년의 20대와 2024년의 20대가 느끼는 한국의 한계점은 분명 다를 것 같아 궁금하다.
책을 읽으며 발견한 몇 가지 노화의 증거.
1. 책장을 넘길수록 자꾸만 기시감이 들어서 계속 읽다 보니, 뭐야 예전에 읽었던 책이잖아? 호주 시민권 가치가 10억 원 정도 된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했던 기억도 얼핏 떠오른다…
2. 영화로 제작됐는데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 그 담배 맛깔나게 피우는 여배우 있잖아… 그… 누구더라 그… 아악!‘ (고아성이었다)
3. 밤에 책을 읽는데 자꾸만 눈이 침침하다.
캐런 제닝스 <섬>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작가의 소설. 한 등대섬에서 홀로 섬을 지키는 등대지기 새뮤얼이 섬으로 표류한 한 남자를 구해 함께 지내면서 나흘 동안 벌어진 이야기이다. (아마 남아공일 것 같은) 국가의 굴곡진 역사, 새뮤얼 자신의 어두운 과거, 그것들이 어우러져 표류해 온 남자를 대하는 새뮤얼의 태도가 시시각각 변한다.
결말이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행동할 줄은 몰랐는데… 비민주적 정치 체제가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망가뜨릴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다. 주권을 잃고 수탈당하는 상태의 식민지 상태의 국가와 독재자가 장기간 집권하며 국민을 탄압하고 자기 배만 불리는 국가 중 무엇이 더 그 국민에게 불행한 일일까? 그걸 둘 다 겪은 나라에 내가 살고 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