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sm, Sarcasm, and Enthusiasm

삶이라는 그랑프리의 핵심은 내면의 피트 크루

by 방향

대학원생 시절, 우연찮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Drive to Survive> (한국명 <본능의 질주>)를 접했다.


생소한, 그러나 인기 스포츠인 Formula 1의 2018년 시즌을 다루는데, 넷플릭스 오리지널 특유의 영상미를 좋아하던 나는 1화 만에 반해버렸다. 시즌 1을 순식간에 다 보고서는 곧바로 F1 공식 유튜브 채널을 구독했다.


그렇게 각 그랑프리 캘린더를 퀄리파잉(예선)과 그랑프리 본선의 하이라이트 영상으로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자동차 영상들이 알고리즘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수 억 원대의 고성능 수퍼카의 리뷰/서킷 주행 영상 또는 본격적인 스포츠 주행 영상들이었다.


견물생심이라고 유튜브를 통해 이것저것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슈퍼카나 고급 자동차에 대해 관심이 가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 학계에 남아 교수가 되는 데 성공하더라도 과연 그 수입으로 내연기관 슈퍼카를 서킷에서 몰아볼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면 답은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사실이 어떤 큰 울림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원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타 볼일 없는 세계의 물건들이고, 그걸로 서킷 주행을 하는 사람은 그 보다 더 적을 테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심레이싱 게임이라는, 실제 자동차 가격과 비교하면 훨씬 저렴한 금액으로 그럴싸한 서킷 주행 경험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문물이 있다. 실제로 상위권 심레이스 선수들이 실차 경기에서도 괜찮은 성적을 낸다는 점들을 고려하면 꽤나 합리적인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서킷주행은 수퍼카는커녕 일반 경차나 소/중형 세단을 타고 가더라도 타이어 값을 비롯한 다양한 소모품, 서킷 이용료 등 다양한 제반비용들 덕분에 돈이 살살 녹는 취미이고, 사고라도 나면 골치가 많이 아파질 게 뻔했다.


내 심레이싱 입문의 계기였다.


사람이 좋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경험, 물건에는 일종의 진입장벽이 존재한다. 사회적 자본을 비롯한 각종 재화가 풍부한 사람일수록 구별 짓기 욕구가 강해 더욱더 진입장벽이 높은 취향/취미를 갖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취향과 취미를 얼마나 오래 향유해 왔는가를 통해 그들만의 세상을 이너서클 안팎으로 더 세밀하게 구분 짓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명확히 소수이다.


따라서 세대와 경제적 상황을 통해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는 것들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을 테다. 달리 말하면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끼리 모였을 경우, 그들이 어떤 면모를 갖고 있는 사람인지 엿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공통된 "진입장벽"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 되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 진입장벽을 "벽"으로 느끼지 않는 사람들을 그냥 부러워할 수도 있지만, 질투를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진입장벽 앞에서 "이것은 내가 할 것이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포기/무시를 하거나 반대로 이 진입장벽을 언젠가는 넘어가기 위한 결의를 다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그 진입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경험의 길이 어떤 것인지에 따라 어떤 태도를 취할지가 정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험은 굳이 해봐야 하거나, 반대로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를테면, 오징어게임을 관람하는 VIP의 경험을 하고 싶어서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극히 드물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평소에 관심을 갖지 않던 것에 갑자기 관심이 생기거나, 뜬금없이 눈앞에 이런 진입장벽이 들이밀어질 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상황은 타인뿐만이 아니라, 내면을 돌아볼 기회를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2부의 부제인 <취향 크레바스>의 크레바스는 삶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온갖 상황들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엇나감/균열의 순간들(Chasm)을 의미한다. 균열의 순간들은 먼저 인지하고 있었다면 맞이하지 않을 순간들이므로, 눈에 가려져 가까이 가기 전까지는 쉬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빙하 위의 균열인 크레바스야 말로 이런 순간들을 가리키기 가장 적절한 어휘가 아닐까?


살아가면서 수도 없이 맞닥뜨릴 선택의 순간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크레바스 앞일 수도 있고, 예견된 갈림길일 수도 있다. 인생의 시나리오를 모든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짜보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미리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은 "상황에 대한 내 태도 및 반응" 같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겪어보거나 상상력의 한계 바깥에서 온 일들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장 쉽게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취향과 취향 크레바스 탐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잠시 지금까지의 흐름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자. 개인이 뭘 어떻게 하기에는 세상은 너무나 크고, 복잡하다. 기술의 발달로 지구상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내 알 바 아닌 일들이 사실은 엄청나게 큰 영향을 줄지도 모르는 알 바 일 수도 있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어떤 사람은 피로감을 느낄 수도 있고, 너무나 아득해서 외면해 버릴지도 모르고, 어쩌면 다양한 불안을 야기할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조차도 너무나 복잡하고, 알기 어렵기에 삶이 너무 버거워질 때도 있다.


이전에 공개한 <삶을 위한 스토리텔링>의 초안에서 언급했듯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친절한 안내자(Guiding Principle)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부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는 돈을 더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고전적인 자본주의적 명제조차도 지금은 안내자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고, 실제로도 드러눕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타당한 관찰로 보인다.


그러나, 사람에겐 언제나 안내자/지표가 필요하다. 삶의 궤적을 되짚어보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그렇다면 이러한 안내자는 어떠해야 할까? 우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줘야 할 것이다. 이해와는 별개로 현상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세상의 복잡함은 현상의 모든 면모를 전부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제한된 인식 속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할 것인지를 정할 수 있게 충분히 단순화해서 "내게 관련된" 부분들을 잘 처리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취향에 대한 진입장벽이라는 크레바스의 예시에서 우리는 질투, 무시와 같은 냉소적 태도(Sarcasm)나 동기부여, 유사한 대안 탐색, 간접경험 같은 다른 방식을 모색하는 열정적 태도(Enthusiasm)라는 상반되는 두 태도의 스펙트럼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취향이나 취미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나름 보편적인 얘기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 대상들끼리나, 그 대상과 나 사이의 관계조차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의 태도는 유전정보라는 서판에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어떠한 태도를 견지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기에, 중요한 것은 결국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다양한 만큼, 사고방식들의 다양함의 크기 (Magnitude)도 엄청날 것이다. 그래도 분명 시대나 상황에 따라 생존 및 개인의 발전에 유리하거나 유용한 사고방식이 있다. 물론 그 사고방식과 개인의 궁합 또한 매우 중요할 것이다.


1부인 방향 메니페스토의 세 편과 2부 취향 크레바스의 초반부에 해당하는 글들의 초안을 쓰면서 발전시켜 나간 이 기획의 테마는 결국 글을 쓰면서 잠재의식 속에 있던 내 사고방식을 내가 읽어낼 수 있는 계위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글을 공개하기로 한 것은 <나를 위한 글쓰기>에서 얘기했듯이 이 글들을 본 누군가에게 도움, 위로, 그도 아니면 어떤 영감이나 공감을 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희망을 품은 내 안의 낭만 때문이다.


이번 글을 통해서 <취향 크레바스>에서 발굴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했으니, 남은 글들을 통해 달라진 대상들에 따라 내 태도와 사고방식의 차이들을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후에 3부에선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도입한 '사고의 도구'들이 무엇이 있고, 나 자신조차 막연해서 언어화하고 싶은 '사용법'들에 대해 써보려 한다.



Gemini_Generated_Image_y0299yy0299yy029.png 이 글을 읽고 Gemini가 생성한 이미지

이 세상은 한 사람의 시야에 모든 것이 다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넓고 복잡해서, 누구도 세상사의 전모를 다 파악할 수는 없겠지요. 그리고 이와 같은 세상의 복잡성이 세상살이를 힘겹게 하지만, 반대로 사람의 다양성이 삶을 더욱 (긍정적으로 건 부정적으로 건) 다채롭게 만들어주지요.


여러분들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필터로 인식해서 독해하며, 어떻게 발화하시나요?



글 목록:


<내 삶 마주하기> 읽기 가이드


1부 방향 매니페스토 - 1 :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의 두려움

1부 방향 매니페스토 - 2 : 방향의 의미

1부 방향 매니페스토 - 3 : 나를 위한 글쓰기


2부 취향 크레바스 - 1 : 쌈띵 온 열 마인드?

2부 취향 크레바스 - 2 : 너 자신을 알라, 그 첫걸음

2부 취향 크레바스 - 3 : 입맛의 미학 (1)

2부 취향 크레바스 - 4 : 입맛의 미학 (2)

2부 취향 크레바스 - 5 : 입맛의 미학 (3)

2부 취향 크레바스 - 6 : 입맛의 미학 (4)

2부 취향 크레바스 - 7 : Chasm, Sarcasm, and Enthusiasm

2부 취향 크레바스 - 8 : 전복적인 전복의 맛

2부 취향 크레바스 - 9 : 나의 문화 예술 답사기

2부 취향 크레바스 - ?? : 내 마음이라는 설원


4부 돌아가는 펭귄 드럼 - ?? : 삶을 위한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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