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감각 경험 중 하나는 오마카세 스시였다.
한 때, 그리고 아마도 지금도, 스시 오마카세는 사치스러운 미식 문화로 여겨졌다. 요즘이야 흑백요리사 같은 넷플릭스 프로그램에 힘입어 "미식 문화" 자체는 상당히 대중화되었지만, 불과 수 년 전만 해도 좀 더 "졸부"나 "허세"라는 말이 따라다니곤 했다.
그 당시 나는 지난한 학위과정을 끝내고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인생의 1/3을 보낸 곳에서 떠날 준비를 하던 시기였는데, 졸업 후 거취가 정해지지 않아 나름대로 마음고생을 좀 했다. 그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연구실을 함께 쓰던 친한 형이 졸업을 축하한다며, 도산공원 쪽에 오마카세 스시를 사주었다.
오마카세 스시 자체는 처음이 아니었지만 인당 20만 원이 넘어가는 한 끼를 가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당시에 예약 가능하면서 맛있는 곳을 찾기 위해 열심히 웹서핑을 했던 것 같다. 재밌는 점은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내가 참고했던 블로그 포스트가 나름 알려진 미식 유튜버 "비밀이야"님의 "스시 마이" 후기였다.
그전까지는 모은 돈 한 푼 없는 나로서는 대학가와 집 근처의 비싸야 2, 3만원 선에서 정리되는 스시집을 기분 전환을 위해 가끔씩 가던 것이, 내가 스시를 즐기는 방식의 전부였다. 아니면 수산시장에서 일하는 친구네 가게에 가거나.
학생일 때는 자연스레 학교 근처의 가게들로 내 경험이 집중되기 마련이다. 나는 특유의 "단골 되기" 장기를 발휘해 몇몇 가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를 통해 자연스레 식재료나 업소용 제품을 비롯한 다양한 이야기를 주워들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때부터 나름의 미식 체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스시 마이"에서의 경험이 충격적이었던가 하면, 다름 아니라 아래의 전복 때문이었다.
전복에 대한 인식을 전복시킨 전복 한 점
지금도 그렇지만 내 세상 속 전복은 쫄깃하거나 씹는 맛이 중요한 식감 위주의 식재료였다. 이때 먹었던 전복은, 지금까지 내가 알던 전복이 아니었다. 그때,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까지 먹어온 전복은 도대체 뭐였던 거지?"
나와 그 형 모두 지금까지 살면서 먹어본 전복과는 완전히 다른 맛에 충격을 받았다. 맛도 맛이지만, 전복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이 박살 나는 경험 덕분에 나는 아직도 그 전복의 맛을 잊지 못하는 중이다. 그때 우리는 이런 게 하이엔드 급 오마카세구나하고 맛있게 즐기고 나왔다.
여기까지 적다 보니 갑자기 생각난 것 중 하나는 흑백요리사 시즌1이 한참 나오고 있을 때의 일이다. 출장 가는 비행기에서 모수에서 일하시는 분과 우연찮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나눴던 얘기들 중에 편식에 관한 질문에,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변을 들었다.
파인 다이닝에선 요리에 편식하는 식재료가 있더라도 먹어보길 추천한다. 파인 다이닝에서 하는 일 중 하나는 식재료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다.
나중에 찾아보고 알게 된 것이지만 스시 마이는 사람들이 한국 오마카세 스시 계보의 한 축을 담당하는 아리아케의 모리타 마츠미 셰프의 영향을 받은 계보에 속한다고 했다. 아무튼 감각적으로 훌륭한 경험을 했으니, 그냥 맛있었다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맛있는지를 생각하면서 갈무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먹으면서 느낀 맛들을 내 경험을 바탕으로 표현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한 점 한 점, 스시가 제공될 때마다 나는 재료에 대해서 물어보면서 나름 메모도 하고, 맛을 음미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었다.
탁월한 감각적 경험은 사람의 정신을 변화시킨다. 훌륭한 음식을 먹으면 갑자기 요리에 관심이 가기도 하듯이 말이다. 이런 과정은 그 자체로도 즐거우며, 지적인 흥미를 동반한다. 이런 감각과 정신의 상호작용을 "감각과 정신의 변증법"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렇다면 맛있게 식사를 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은 어떻게 이름 붙일 수가 있을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음미하는 것은 감각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련 정보들을 읽어내는 의외로 복잡하다면 복잡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해당 음식에 대해서 얘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이 과정을 일종의 독해라고 생각해도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낀 맛을 표현하면서 내 생각을 말하는 것 또한 단순한 감상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를 일종의 발화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는 식사 시간 동안 계속해서 반복되며 변주된다. 발화가 새로운 독해거리를 호출하고, 추가된 독해는 새로운 발화로 이어진다. 이러한 피드백 회로를 "독해와 발화의 변증법"이라고 불러보자.
이제 우리는 네 가지 주제를 갖고 있다. 감각, 정신, 독해, 발화. 미식에 있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일을 따로따로 생각하기 어렵듯이, 이 주제들은 결코 독립된 것들이 아니다. 맛을 보기 위해선 씹고 뜯어야 하며, 즐기려면 그 감각을 독해하고 그 감각을 나눠야 한다.
정신은 독해와 발화를 매개하며, 이를 통해 변화된 정신은 감각 위상을 더 높이게 된다. 이렇게 두 변증법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언제나 다른 하나가 필요하니, 이를 테면 상보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가 의식적 층위에서 작동한다면, 다른 하나는 무의식적 층위에서 작용함으로써 이 두 변증법이 함께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요리 설명을 듣고 어떤 맛이 날지 상상으로 예상하기도 하고, 예상외의 맛을 느끼고 어떻게 만들어진 요리인지 생각해보기도 하듯이.
미식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변증법적 작용은 또 다른 재밌는 측면을 우리에게 드러내준다. 바로 아비투스이다. 태어나기를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풍부한 경험의 축적을 통해 의식에서 작용하는 감각과 정신의 변증법을 무의식의 층위에서 작용하게 만든다. 정신이 작용하기 전에 감각의 독해와 발화가 중첩되어 이후의 독해에 일종의 보강간섭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오해는 없길 바란다. 돈 많다고 맛잘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적다고 맛알못인 것은 아니니 말이다.
흔히 사람들은 많은 경험을 통해 얻어진 "자연스러운 감각의 독해 및 발화"를 "의식적 훈련을 통해 강화된 독해와 발화"보다 우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소위 맛알못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의식적인 감각과 정신의 변증법이 감각에 대한 독해와 발화의 변증법에 끼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편이 더 즐겁다.
그래서 나는 마냥 부러워하기보다, 의식적으로 순간순간의 감각과 그에 수반되는 정신적 자극들을 즐기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 더 즐겁다.
언제부턴가 기왕 살아가는 것, 최대한 즐기며 살아가자는 삶의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유튜버들이 자신들의 삶마저도 콘텐츠로 생각하듯이, 개인은 결코 총체적으로 인지할 수 없는 이 세상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끝없는 콘텐츠라고 생각하면 나름 낙천적이게 되는 것이다. 콘텐츠만 무한인 것이 아니라 즐기는 법도 무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이 글의 슬로건은 단순하다.
무한으로 즐겨요
그야말로 럭키비키. 분하지만 원영적 사고보다 찰진 마무리는 못 하겠다.
이 글을 읽고 Gemini가 생성한 이미지여담이지만 스시 마이는 문을 닫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음차한 고킨이라는 새로운 가게를 운영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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